창213/경포대 가던 날

2025-05-28     백두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동해안으로 바다여행을 떠나는 조건이었다. 서울에서 살다 지방의 작은 도시로 직장을 옮긴 탓에 주말부부로 살았는데 불편해서 아예 이사를 가자고 했을 때 아내가 제시한 조건이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무리한 조건이었지만 당시에는 망설이는 아내를 설득하려면 그렇게라도 달래야 했다. 그래서 처음 한 두 번은 약속대로 동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일찍 집에서 저녁을 먹고 출발해 주문진항까지 가 밤늦도록 회를 먹고 밤바다까지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오면 겨우 12시가 조금 넘었으니 별 부담도 없었다. 서울을 벗어난 여유가 제법 크게 느껴졌다. 계속 서울에 살았다면 어림없는 일이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런데 사탕발림이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고 나도 사람이라 금세 초심을 버렸다. 번잡한 도시 생활이나 한적한 시골 생활이나 여유가 없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라며 아내가 핀잔을 줄 때마다 못들을 척 딴소리로 일관하다 결국은 진공청소기를 들거나 설거지를 해야 타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별 것 아닌 약속 하나가 빌미가 되어 철저하게 을이 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얼마 전 모처럼 경포대 여행길에 올랐다. 힘들게 일해 돈 벌어다 바치면서 단지 약속을 안 지킨다는 이유 하나로 타박까지 듣기에는 너무 억울해 작정을 했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같은 남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막상 떠나고 보니 별 것도 아닌데 실천하는데 꼬박 1년씩이나 걸렸다니 좀 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일이 꼬였다. 횡성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신용카드가 없었다. 성격상 카드를 한 장만 사용하는데, 어젯밤 아내가 내 카드를 빌려 달래서 빼 주었더니 다시 넣어두지 않은 것이다. 할 수 없이 아내의 카드를 달랬더니 아예 집에 지갑을 두고 왔다며 화들짝 놀랬다. 우리 부부는 철저하게 독립채산제라 서로 계산하지 않으려고 미루는 타입이라 아내는 1년 만에 약속을 지키는 여행에서 철저하게 갑이고자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려면 어제 밤 카드를 꺼내가지나 말던지 은근히 약이 올랐다. 카드가 없으면 휴일이라 현금을 인출할 통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모두 사무실에 두고 와서 궁색한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행을 취소할 수도 없고 칼국수나 한 그릇씩 먹고 바다나 보고 올까? 무작정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하고 동서에게 전화를 걸어 식당주인 통장으로 송금하라 할까?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자동차 기름도 꽉 차 있었고 고속도로비는 하이패스가 충전되어 있지 않은가. 내친김에 차를 돌리지는 않고 용감하게 강릉까지 갔다. 학창시절처럼 무전여행으로 견딜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막연히 무슨 방법이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갑자기 차 안에서 잘 쓰지 않던 통장 하나가 느닷없이 나왔기 때문이다.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비용이 있어서 목돈을 넣어두었는데 생각보다 잔고가 꽤 남아 있었다. 신이 나서 신한은행 강릉지점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그러나 안도감이 지나쳤는지 몰아도 너무 세게 몰았다. 현금인출기를 불과 50미터 남겨두고 그만 찰칵! 무인카메라 단속에 걸린 것이다. 지폐 몇 장을 찾기 위해 8 만 원짜리 신호위반 스티커가 발급 될 것 같다. 안 되는 날은 정말 뭘 해도 안 된다. 새삼 다시 짜증이 밀려왔다.

이럴 땐 연장 탓을 하는 것이 내 오랜 습관이다. 나도 모르게 겁도 없이 아내를 탓하기 시작했다. 회를 먹으면서도, 커피를 마시면서도 아내를 나무랬다. 그랬더니 결국 아내 입이 나올 대로 나와 버려 그만 집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차 안에서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무 말도 안했다. 그저 나는 과묵하게 운전만 하고 아내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만 빠져나와야 할 톨게이트를 지나치고 말았다. “왜 계속 내려가요?”하고 물어보는 아내의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엉뚱한 길을 목적 없이 가고 있었다. “진작 말했어야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 오랜 세상 이치다.

결국 나는 여러 날 동안 밥상에서 김치와 밥 말고는 구경하기 힘들었다. 절대로 변명은 아니지만, 아내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알지만, 그래도 이상한 것은 이럴 경우 같이 싸워놓고 왜 남자들만 늘 보복을 당할까. 나의 긍정적인 성격상 이것은 시련이 아니라 생각을 여물게 하는 절차라고 믿으려 하지만 이내 아내를 향한 소심한 역심이 고개를 든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돈독하게 하려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많은 선배들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믿으려 하지만 갈수록 이렇게 을이 되어가는 옹색한 처지가 반항심을 부추긴다.

그렇더라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열대지방의 나무에는 나이테가 없다고 하질 않는가. 덥고 추운 춘하추동, 4계절이 한 바퀴 돌아야 나이테가 생기는 법이다. 때로 다투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는 일상이 켜켜이 나이테로 쌓여 나의 가정을 굳건하게 지켜 주리라. 아무렴 그렇고, 말고.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을 믿기로 하자. 그저 경포대 가던 날 나의 실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였고, 김치 한 가지로 삼켜야 했던 딱딱한 밥은 더욱 굳어버린 땅이 분명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을이면 어떤가. 부디 아내와의 약속을 법이라고 생각하고 살자. 늙어 다리에 힘 빠져가는 것도 억울한데, 하루 세 끼 밥에 굴복해 나처럼 너무 쉽게 가장의 자리에서 소수자로 전락해 살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