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38/나도 이제는
얼마 전 TV를 보던중 제사지내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자연스럽게 제사 상에 술잔을 올리고 있었는데 우리 집 막내아들이 한마디 했다.
"아빠! 술잔은 향불위에서 시계반대방향을 올려야 하는데 저 아저씨 시계방향으로 잘못 돌리는데요?"
"그러네. 저 아저씨가 잘 모르나보다. 술잔을 거꾸로 돌리고 있네."
녀석... 언젠가 제사를 지내면서 일러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누구나 한 번 지나간 과거는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을 가졌다. 누구라도 향수다. 그래서 시계를 되돌려 과거, 조상들이 살아계신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술잔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리든, 시계방향으로 돌리든 무엇이 달라질까만 그리운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하는 것이리라.
며칠 더 지나면 나의 아버님 기일이다. 솔직히 내 아버지는 그렇게 훌륭하신 분은 아니셨다. 그저 평범한 시골 농부셨는데 철마다 부지런하게 일하신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만한 자랑이 없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시골 농부들이 그랬듯 아버지는 한 해 농사로 버신 돈의 대부분을 겨우내 쓰시기 바빴다. 노름 하시느라 종종 외박도 하셨고 대취해서 들어오신 날은 어머니와 다투며 살림살이를 부신 기억도 많다.
그런데 아버지께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술에 취해서 늦게 들어오신 날일수록 다음날은 더 일찍 일어난다는 점이다. 원래 아침잠이 없으시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날은 더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나무를 한 짐씩 해오셨다. 더욱이 전날의 실수가 큰 날일수록 나뭇짐이 산더미같이 컸다. 새벽 나뭇짐은 아버지만의 자기반성문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과묵하신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청할 수 있는 유일한 화해 방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때마다 어머니 마음이 눈 녹듯 녹았으리라. 숙취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일어나기 힘드셨을 텐데 어떻게 그런 정신력을 발휘하신건지 취하면 취할수록 더 늦게 일어나는 나로서는 참으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런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자식들과 소통이 부족하셨고 자상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긍정도 늘 침묵이시라 진의를 살피려면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 5남매는 갖고 싶은 것이 있거나 실수를 할 적마다 무던히도 어머니만 괴롭혀 드렸다. 지금도 그때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무던히도 원망스러운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나는 왜,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그립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것일까. 어디서 이런 변덕스런 마음이 새롭게 생긴 것인지, 세월이란 참말로 묘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 그리워 제사 상 위에서 아무리 술잔을 거꾸로 돌린다 한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더라도 줄어들지 않는 그리움을 어쩌라는 것인가. 나도 이제는 진짜 아버지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