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40/대박의 꿈
아무리 읽어봐도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계획서였다. 만약에 내게 로또 1등에 당첨되는 행운이 온다면 취할 나의 인생계획서가 그렇다는 말이다. 계획서에 의하면 나는 당첨되더라도 잠적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당분간 현재의 직장에는 계속해서 출근하는 것이다. 딱 한 달만 더 출근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랑할 시간이 필요해서다. 로또에 당첨된 후 몰래 사라지는 사람들은 참말로 미련하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다고 뻐기면서 누릴 부러운 시선을 도대체 왜 내가 포기해야 하나. 어서 빨리 로또를 사라며 느긋하고 인자한 목소리로 동료들에게 자랑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런다고 누가 당첨금을 뺏어가는 것도 아니고 로또 당첨이 취소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시들해지면 용맹스럽게 사직서를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퇴직금을 사무실 회식비로 쾌척하고 위풍당당하게 회사 정문을 나서면 되는 것이다.
수십 년을 다니던 직장이지만 퇴직한다고 하루아침에 일거리가 없어져 심심할 것 같지도 않다. 두둑한 통장 잔고를 펼쳐놓고 <포트폴리오>를 짜자면 얼마나 바쁠 것인가. 학창시절 경영학 강의시간에 배운 황금비율로 당첨금을 적절하게 분배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자면 하루해가 짧을 수도 있다. 진부하더라도 우선은 남들처럼 부동산에 투자해 짭짤하게 월세 수입을 올려봐야겠다. 그리고 일부는 주식을 사서 365일 쉬지 않고 내대신 돈을 벌어줄 <아바타>를 만들 것이다. 그러고도 남은 돈은 어느 날 갑자기 지진으로 은행이 폭삭 주저앉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현금으로 보유할 것이다. 그런 다음 남은 인생을 30년으로 잡고 360개월로 나눈 금액만큼 매월 쓸 것이다. 할당량만큼 남기지 않고 꼼꼼하게 쓸 것이다. 야무지게 쓰고 또 써도 <아바타>가 대신 벌어주니까 줄어들지 않는 통장 잔고가, 아... 지겨울까 걱정이다.
그런데 황당하다. 어서 빨리 당첨이 돼야 이렇게 훌륭한 계획서를 활용할 텐데 도대체 당첨될 기미가 없다. 지난 주말의 추첨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2. 10. 11. 25. 33. 39. 당첨번호 6개를 철두철미하게 체크했지만 당첨번호마다 동그라미를 그리려던 볼펜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만원어치 두 장에 부여된 자동번호 60개중 한 개도 맞은 번호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재수가 없는 날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그 많은 번호 중에 단 하나도 맞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건 뭐 1등보다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남들은 종종 5개도 맞고 4개도 맞더라만 내가 그렇게까지 재수 없는 사람일까. 한심하고도 씁쓸했다. 언젠가 로또광인 이웃집 영감이 "그놈의 로또 맞아야 로또지, 안 맞으면 조또여!" 하고 투덜대더니 내가 그 꼴이 아닌가.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계속해서 사야지. 그간 들어간 본전이 얼만데 내가 여기서 멈출 바보가 아니다. 계획서가 아까워서라도 계속해서 사고 또 사야 한다. 그래... 실망은 단지 10분이고 다시 사면 또 일주일간 계속해서 기와집을 짓고 부술 특권이 내게 생긴다.
도대체 누가 이런 행복한 로또를 사행성 도박이라고 한다는 것인가. 로또는 이미 전국적인 규모의 거대한 계가 된지 오래다.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계중 가장 큰 계다. 미련하더라도 계속해서 사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설국열차의 <꼬리칸>에서 뽑힌 한 명이 되어 <머리칸>으로 보내지는 날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고지가 바로 저기다. 나야말로 이시대의 자본주의가 낳은 혁명적인 국민계의 주인공이 될 날이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로또는 계와 달리 결정적인 함정이 있다. 계라는 것은 계주가 도망만 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내차지가 오는 것이라 착실하게 불입하고 날짜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더구나 계는 순번에 따라 앞 번호는 <대출> 개념이라 이자를 내고 뒷 번호는 <예금> 개념이라 이자를 받는 시스템이니 금융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자생적인 금융기관의 역할도 했다. 심심하면 한 번씩 사기꾼들이 나타나 일간신문 사회면을 도배하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대개는 유익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로또는 타먹은 사람이 또 타먹을 확률이 있어 불안하다. 이자개념도 없어 당첨자가 많고 적음에 따라 금액만 달라질 뿐이라 생산적이지도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또는 인간적이라 좋다. 무릇 부자가 되려면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은 작은 돈이라도 아껴야 하는 법이다. 택시비라도 아껴서 로또를 사는 습관을 가진다면 어서 빨리 부자가 되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작은 돈이 언제 쌓일지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보다는 일백 배 더 현명하다. 작은 절약이 쌓이고 쌓여 큰 부를 이루는 것이라고 배웠거늘, 부자를 보면 부모 잘 만났다고 폄하해 버리는 게으른 사람들보다는 일천 배 더 멋지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더 큰 부자일수록 더 노력했을 가능성이 큰 것인데 내가 올라가지 못할 나무라고 온갖 탈법으로 재물을 모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스스로의 게으름을 인정하고 로또라도 사서 가능성을 높이고자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게으른 자들이여! 두드려야 열린다. 나처럼 로또라도 사면 한 번은 두드리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 길거리라도 걸어야 흘린 돈이라도 줍는다. 걷기운동이 건강에도 좋다는데 부지런히 걷도록 하자. 걷는 김에 편의점이라도 들러 로또를 사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자. 그리고 매일 밤 꿈속에서 조상신을 기다리자. 제발 이번 한번 만 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천성이 게으른 자들이 신기하게도 유독 조상 모시기에만 바지런을 떨었을 리 만무한 일이겠다만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다음 순번이 나일지도 모른다. 더욱 더 가열차게 대박의 꿈을 두드리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