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열차 같은 삶을 살자-
12월 3일, KBS에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도전 꿈의 무대 왕중왕전 방청에 당첨되셨습니다.” 며칠 전 응모하긴 했지만, 경쟁이 치열하다기에 잊고 있었다. 아마도 “시골에서 살아가는 70대 노부부의 간절한 소망”이라는 사연이 제작진의 마음을 움직인 게 아닐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반가운 소식을 아내에게 전했더니 기대했던 반응은커녕, 미간부터 찌푸린다. “전날 미리 서울 올라가서 자라고? 그럴 가치가 있을까?” 백발이 성성해진 아내는 요즘 유난히 모든 일이 귀찮다며 투덜댄다. 세월이란 게 이렇게 스며드는 모양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서울 구경도 하고, 생방송 제작 과정도 한 번 구경하자며 설득했다.
우리 부부는 ‘아침마당’의 단골 시청자로, 특히 ‘도전 꿈의 무대’는 매주 가슴을 울리는 코너다. 유명세보다는 무명가수들의 사연이 더 찡하다. 노래보다 삶이 감동을 주는 세상이라니, 나이 들수록 더 공감이 간다.
올해 마지막 ‘왕중왕전’에는 실력파 가수 6명이 나섰고, 준결승을 거쳐 ‘남궁진’, ‘전종혁’, ‘하루’ 세 명이 결승에 올랐다. 다들 멋진 가수지만, 나는 스물두 살 청년 가수 ‘하루’에게 마음이 갔다.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와 살며 꿈을 붙들고 무대에 서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나와 닮아 더 애틋했다. 이번 서울 나들이의 가장 큰 목적도 사실은 그 청년을 응원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가까운 거리의 1박2일 여행이지만 여정 준비는 ‘스마트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첫 번째 과제는 숙소 예약으로 조건은 KBS까지 걸어서 갈 수 있고 숙박료가 합당해야 한다. 그런데...
여의도 호텔 가격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시골영감 기준을 벗어난 사치다!” 그렇게 한참을 뒤져 마침내 KBS 별관 근처의 적당한 숙박업소를 찾았다. 간판은 호텔이지만… 마음은 모텔에 가까운, 그런 곳이다.
다음은 교통편 예약이다. KTX도 고속버스도 있지만, 나는 늘 완행열차가 좋다. 창밖 풍경을 천천히 즐길 수 있고, 경로우대까지 되니 경제적이다. 그래서 ‘주덕역’에서 출발하는 하루 한 번뿐인 서울행 무궁화호를 예약했다. 영등포까지 8천500원. 역시 완행은 사랑이다.
10월 9일 아침, 잠옷과 간단한 간식을 챙겨 아내와 기차역으로 향했다. 9시 57분 출발 열차는 청주와 수원을 거쳐 두 시간 반 후 영등포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이라 어디서 먹을까 두리번거리다 결국 ‘장터국밥’이 떠올랐다. 서울까지 와서 장터국밥이라니… 하지만 시골영감의 입맛은 어쩔 수 없다. 영등포전통시장까지 스마트폰 길찾기로 500m. 순대골목의 ‘아바이순대’ 집에서 순대국밥 한 그릇씩 깨끗하게 비웠다. 아내도 만족했다고 하니 더 바랄 게 없다.
점심 후 전철을 타고 KBS 별관과 숙소 위치를 미리 확인했다. 그리고 여의도 곳곳을 걸어 다녔다. 새로 들어선 국제 금융가의 초고층 건물들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50년 전 젊은 시절 여의도를 누비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한강공원은 겨울의 적막 속에서도 아름다웠다. 멀리 남산타워가 붉은 석양을 받아 빛나고, 강변도로에는 퇴근 차량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하루 종일 1만6천보를 걸었더니 인공관절 무릎이 슬슬 항의하기 시작했다. 저녁엔 아내와 참이슬 한 병 나누어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간단히 전복죽을 먹고 KBS 별관으로 갔다. 이미 많은 팬클럽이 줄을 서 있었다. 남궁진은 노란색, 전종혁은 보라색 티셔츠. 내가 응원하는 ‘하루’는… 색깔이 아직 없었다. “이제 곧 생기겠지.” 스스로 위로했다. 맨 앞줄 좌석을 배정받았지만, 아내가 부담스럽다 해 끝줄로 옮겼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아내가 편한 게 중요하다.
생방송 스튜디오에는 카메라 여섯 대, 진행 시간 맞추는 피켓, 연출진의 분주한 움직임. TV로만 보던 세계가 눈앞에서 펼쳐지니 신기하면서도 묘하게 설렜다. 무대에 서는 가수들의 노래는 한 곡 한 곡 모두 울림이 있었다. 아내는 결국 눈시울을 훔치고 말았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결과 발표. ‘하루’가 12만921표로 왕중왕에 올랐다!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박수를 치고 웃었다. 눈물, 감동, 그리고 기쁨, 나들이의 보람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방송을 마치고 여의도 본관을 들렀다. 기자들, 노조원들의 시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거대한 조직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이어서 국회의사당으로 걸었다. 나에게는 젊은 날의 추억도, 최근의 격동의 기억도 서린 곳이다. 의사당 앞에 서니 지난날의 사건들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는데, 나는 이제 그 속도를 조금 내려놓고 있다.
다음 목적지는 노량진 수산시장. 세 번째 방문이지만 처음 온 듯 새로웠다. 깔끔하고 활기찬 시장 풍경에 저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대방어회 한 접시에 7만 원입니다.” 순간 망설였지만 아내의 표정이 ‘허락’으로 읽혔다. 그리하여 오늘의 호사는 대방어회와 매운탕, 그리고 소주 몇 잔. 값은 10만 원. 조금 비싸도, 인생에 이런 날도 있어야 한다.
마지막 코스는 백화점 구경이다. 영등포 롯데백화점에서 1층부터 8층까지 천천히 둘러봤다. 물건을 산 건 없지만 보기만 해도 구경 자체가 재미였다. 가끔은 이런 ‘눈호강’도 여행의 묘미다. 출발 시간이 되어 완행열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도시의 불빛을 보며 생각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참 알찬 여행이었다.”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재촉하며 살아왔던가. 빨리, 더 빨리, 그렇게만 달려왔다. 이제는 빠른 것도, 복잡한 것도 싫다. 느리게, 천천히, 여유 있게.
오히려 완행열차 같은 삶이 좋다. 더 늙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아내와 함께 천천히 가는 여행을 자주 떠나고 싶다. 이제야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는 나이가 되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