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으로 배운 ‘남편’과 ‘아버지’의 자격

-연탄아궁이에서 산후조리가 행복했던 남자-

2026-01-27     유병태
​필자는 48년 전 아내의 첫 출산 후 산후조리를 하면서 남편과 아버지의 의미와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1만 5천 원 단칸 월세방에서 신혼살림을 하던 1978년 초가을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자 아내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만삭의 아내였지만 무지했던 나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녁밥을 먹자마자 힘든 훈련의 여파로 잠에 곯아떨어졌다.

새벽녘, 아내의 신음 소리를 듣고서야 출산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 가까운 곳에 병원이 없어 춘천 시내까지 가야만 했다. 자가용도 없고 대중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이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부대에 연락해 군수참모 전용차인 5호차(지프)와 운전병을 지원 받았다. 정신없이 허둥대며 진통 중인 아내를 태우고 춘천으로 향했다. 경험이 없으니 산모에게 필요한 물건들은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다. 산골 비포장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군용 지프차의 속도는 유난히 느리게만 느껴졌다. 긴장과 초조 속에 한 시간 넘게 달려 춘천시 소양로3가에 위치한 ‘지성산부인과의원’에 도착했다.

다행히 앞에는 대기 환자가 한 명뿐이라 입원 절차를 비교적 빨리 마칠 수 있었다. 산모의 상태를 살핀 의료진은 급박한 상황에 곧바로 분만실로 안내했다. 잠시 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남자아이의 울음이었다. 곧 간호사가 나와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라고 웃으며 알려주었다. 분만실로 들어가 보니 산모도 아기도 모두 건강했다. 신기하고 감사하고, 무엇보다 기뻤다.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차 안에서 출산할 뻔했다. 나의 미련함과 무지 속에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큰아들 ‘용균’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병원에서 사흘을 조리한 뒤 퇴원해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까지는 차가 들어가지 못해 마을 어귀에서 내려 200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택시가 멈추자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마중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축하해요”라며 기쁜 얼굴로 얼른 아기를 받아 안으셨다. 집으로 가는 길에 마을 아주머니 한 분이 “뭐 낳았어요?” 하고 묻자, 집주인 아주머니는 “아들이야! 시시하게 딸 낳을 줄 알았어?” 하시며 마치 자기 손자라도 본 듯 크게 기뻐하셨다.

당시에도 출산을 하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상당 기간 산후조리를 해주는 것이 상례였다. 이를 ‘산후바라지’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안 계셨고, 장모님은 얼마 전 친손녀의 산후 뒷바라지를 하신 터라 오시지 못했다. 일 년에 두 아이의 산후조리를 하지 않는다는 풍습도 있었다. 결국 산후바라지를 해줄 사람이 없어 부득이 내가 맡아야 할 형편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미역국을 끓여 아내에게 주셨다. 이튿날 아침에도 그렇게 해주셨다. 고맙긴 했지만 농사로 매우 바쁜 시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 이상은 후의가 아니라 폐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머니께 미역국 끓이는 법과 밥 짓는 법을 배워 아내의 산후 뒷바라지를 직접 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요즘 같은 현대식 조리기구가 없었다. 하루에 두세 번씩 갈아야 하는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려면 나름의 기술이 필요했다.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배운 솜씨로 소 사골과 등뼈를 넣어 곰국을 끓였다. 부엌에는 연탄아궁이 옆에 군불을 때는 나무아궁이가 있어 국을 달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장작불을 지피고 큰 솥에 사골과 등뼈를 깨끗이 씻어 초벌로 끓인 물은 버린 뒤 다시 씻어 세 시간 이상 푹 고았다. 완성된 곰국은 찜통에 담아 보관했다.

미역은 물에 불려 잘게 썬 뒤 참기름에 부드러워질 때까지 볶았다. 여기에 미리 끓여둔 곰국을 붓고 간장으로 간을 맞춰 미역국을 완성했다. 밥과 함께 상을 차려주면 아내는 맛있다며 잘 먹었다. 보람과 자신감, 성취감이 어우러져 기분이 좋았다.

미역국 끓이고 밥 짓는 일은 그래도 할만 했다. 더 어려운 건 기저귀 빨래였다. 아기와 산모의 기저귀는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필요했다. 산모는 찬물에 손을 담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출산 후에야 알았다. 퇴근 후 아내의 밥상을 챙겨주고, 하루 동안 모아둔 기저귀와 빨래를 들고 집 앞 개울로 나갔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과 넓적한 자연석 빨랫돌 위에서 치대고 비비며 빨았다. 집으로 돌아와 연탄불에 삶아 헹군 뒤 빨랫줄에 널어 햇볕에 말렸다. 남들 눈에 띌까 봐 모든 일은 깊은 밤중에 했다. 스물여덟 살 청년에게는 부끄럽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속내는 조금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신바람이 났다.

다행히 산모는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산후조리를 마쳤다. 아기는 모유가 충분해 분유를 먹이지 않아도 되었다. 배고플 때와 졸릴 때를 빼고는 보채지도 않았다. 아빠의 어설픈 산후조리 실력을 알아준 것인지 고맙게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일주일쯤 지나자 아내는 스스로 하겠다며 부엌으로 나오려 했다. 나는 “안 된다!”고 나무라며 다시 방으로 들여보냈다. 아침과 저녁은 함께 먹었지만, 출근 후 점심은 미리 준비해야 했다. 아침에 지은 밥과 미역국을 식지 않게 연탄아궁이 석쇠 위에 올려놓고 출근했다.

부엌에는 수돗물이 없었다. 마당가의 펌프식 지하수를 사용했다. 온수는 큰 가마솥에 장작을 때 데우거나, 알루미늄 양동이에 물을 담아 연탄불 위에 올려두면 밤새 은근히 데워졌다. 그 물로 산모와 아기를 씻길 수 있었다. 그렇게 보름 동안 즐겁게 산후조리를 하는 사이, 아내는 차츰 일상에 적응해 갔고 이후에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내며 일상으로 복귀했다. 지금도 아내는 그때의 산후바라지가 가장 좋았고, 내가 끓여준 미역국이 제일 맛있었다고 말한다. 칭찬에 고무된 나는 3년 뒤 둘째 아이 때도 남자 산후도우미 역할을 무사히 해냈다. 그 시간은 삶의 가치와 이유를 한 단계씩 깨닫게 해준 소중한 시기였다.

냉장고와 세탁기, 산후조리원과 출산휴가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이었지만, 그 시간들은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 있다. 결코 부끄럽지 않은, 오래도록 꺼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 보따리 속의 보물이다. 그로부터 15년 뒤 아이들과 함께 그곳을 다시 찾았다. 미역국 끓이는 법을 가르쳐 주셨던 주인집 아주머니 내외분은 예전처럼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셨고, 출가한 따님까지 불러 성대한 오찬을 베풀어 주셨다. 조그만 성의로 답례를 하고 왔지만, 그 감사함은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태어난 아이는 잔병치레 한 번 없이 자라 올해 마흔여덟 살이 되었다. 원자로 설계와 인공지능(AI) 분야의 선구자로서, 국가와 인류의 번영에 이바지하고자 과학자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아들을 바라보며 우리 부부는 가끔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연탄불 위에 올려두었던 미역국, 밤중의 개울가, 그리고 서툴지만 진심이었던 시간들. 이야기가 끝날 즈음이면 우리는 말없이 바라보면서 같은 마음으로 조용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