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행복으로 가득 채워진 한 달

2026-02-03     차지숙

1970년대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말이 유행했다. 세월이 지나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더니, 인구가 포화 상태가 되자 ‘한 집 건너 하나만 낳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산아 제한에 목을 매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금슬이 좋다 보니 자식을 줄줄이 낳아 미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첫째로 낳은 아들은 의료 사고로 태어나자마자 하늘의 별이 됐다. 남들은 품격 있어 보이게 자식이 한 명 아니면 두 명이었다. 우리는 아들을 선호하던 시절에 딸만 셋이었다. 아들 낳으려고 줄줄이 딸만 낳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남들이야 미개인이라 하든 말든, 딸 셋은 부모의 삶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지금은 인구 절벽 시대라 돈을 주면서까지 아이를 낳으라 하지만, 그때는 자식이 많으면 주눅 들던 시대였다.

딸 셋 중 둘째 딸은 캐나다에서 23년째 살고 있다. 그때 둘만 낳았더라면 지금처럼 행복했을까 생각해 보면, 딸 셋인 것은 우리 부부에게 분명한 축복이다.

이번에 캐나다에 사는 딸이 태국 국제 도자 심포지엄에 참석한 뒤 한국에 왔다. 지난해 5월과 12월에 이어 일 년에 두 번 한국에 온 것은 처음이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행복해지지만, 언제나 우리 집에 오는 서열은 꼴찌다.

한 달 일정으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열흘 남짓 우리 집에 있었는데, 그 시간들이 참 많이도 행복했다. 둘째 딸은 나를 닮아 물을 좋아해 어디를 가든 물만 있으면 된다. 여행지는 해외든 국내든 물만 있으면 된다는 딸을 위해 제천 킹스파 찜질방도 가고, 대명 소노밸 사우나도 가고, 풍기 온천도 찾았다.

풍기에 계신 102세 시어머니를 찾아뵈니 “니가 미국서 왔나, 꿈 같데이” 하시며 손을 꼭 잡으신다. 섭섭함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카페에 들러 차를 마셨다. 사방 유리에 비친 겨울의 쓸쓸한 풍경도 딸과 함께라서 따뜻했다.

둘째 딸을 위한 이벤트는 계속됐다. 온 가족이 모여 리솜 헤브나인에서 마음껏 물놀이를 했다. ‘노약자는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어도 나는 겁도 없이 바가지에서 쏟아지는 물 폭탄을 계속 맞았다. 부력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몸이 휘청거렸지만, 잘 버티는 걸 보니 내가 노인이 맞나 싶었다. 튜브 놀이도 몇 바퀴를 돌아도 지칠 줄 몰랐다.

열정적인 커플이 남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튜브 위에서 쪽쪽 입을 맞추는 장면이 눈에 들어와 잠시 질서가 마비되기도 했다.

며칠 뒤 강릉에서 온 가족이 호캉스를 즐기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이른 아침 서둘러 집을 나섰다. 모처럼 장거리 여행이라 남편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 안에서 흘러가는 풍경을 슬라이드처럼 느긋이 즐기고 싶어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택했다.

영월 쪽으로 접어드니 칙칙한 수묵화라기보다 쌀가루를 살짝 뿌려놓은 듯한 무채색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남편과 집을 나서기만 하면 무조건 룰루랄라다. 남편을 좋아하는 내 마음은 국보급이라 우기고 싶다. 50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았는데도 콩깍지가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다. 코팅된 콩깍지 덕분인지 설레는 마음도 지칠 줄 모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손도손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강릉에 도착해 있었다. 손자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투명 인간처럼 살아가다 보니 보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는 캐나다 손자가 빠져 아쉽지만, 산소 같은 두 손자와 재잘재잘 겨우 말을 하는 귀염둥이 손녀까지 함께하니 최상의 조합이다.

물 위를 유영하는 둘째 딸의 얼굴은 언제나 행복하다. 딸들과 손자들은 영하의 날씨에도 ‘구름 위의 해변’이라는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물 좋아하는 건 내가 원조지만 영하의 날씨에 용기가 나지 않아 큰딸과 나는 사우나로 향했다. 럭셔리한 분위기 속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누이니 그 또한 낙원이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 딸들 덕분에 노후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음이 고맙다. 한 명이라도 딸이 못살았다면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까. 걱정 없이 그만그만하게 사는 것, 그것이 부모에게 가장 큰 효도다.

바닷가에 왔으니 회로 입 호강을 했다. 강릉 시장을 지나던 중 예전에 유행했던 네 컷 사진관이 보여 들어갔다. 가족 아홉 명이 찍다 보니 얼굴이 다 들어가지도 않고, 머리만 나온 사람, 얼굴 반쪽만 나온 사람, 아예 안 나온 사람도 있었다. 자유분방한 포즈의 사진이었지만 깔깔거리며 웃는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렀다. 우리 식구들만 있어 조용히 수다를 떨다가 딸들은 서울로 떠나고, 우리는 단양으로 돌아왔다. 둘째 딸은 여행의 끝자락에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처음에는 하늘을 날아 지구 반대편으로 딸을 보내는 게 너무 아파 눈물로 배웅했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이제는 눈물도 서운함도 담담함으로 바뀌었다. 엄마의 행복은 자식을 붙잡는 데 있지 않고, 성공한 삶을 사는 딸을 기꺼이 놓아주는 데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딸아. 한 달 동안 한국에서 함께한 시간은 내게 여한 없는 행복이었다. 네가 좋아하는 일에 열심히 매달려, 타국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