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거둔 엄흥도, 동료 수습 엄홍길…500년 잇는 의리의 울림

-영월 엄씨의 충절과 의리-

2026-03-09     제천단양뉴스
엄홍길 대장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8일 기준 누적 관람객 1천80만명을 기록, 흥행 돌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500여년 이어온 영월 엄씨 가문의 목숨을 건 ‘의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 영화에서 영월 호장 ‘엄흥도’는 청주 출신 배우 유해진이, 비운의 왕 ‘단종’은 배우 박지훈이 연기했다. 

장 감독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시선이 더해지며 작품은 딱딱한 사극이라기보다 결국 ‘사람 이야기’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특히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의 애틋한 모습과 인간적인 엄흥도를 그려낸 유해진의 연기는 웃음 속에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엄흥도의 직계 후손인 청주 청년극단 배우 엄춘미가 광천골 마을사람 역을 맡는 등 유해진이 속했던 청년극단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것이 지역 문화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속 인물 ‘엄흥도’는 실제 조선 시대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실존 인물이다. 조선 세조 때인 1457년 어린 임금 ‘단종’은 영월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당시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졌지만 엄흥도는 홀로 단종의 시신을 거둬 장례까지 치르고 자식들과 은신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지켰다는 점에서 그는 충절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엄흥도의 충절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고종은 1876년 그에게 ‘충의’라는 시호를 내렸다.

500여년이 흐른 뒤 히말라야에서 엄흥도의 직계 후손에 의해 비슷한 ‘의리’가 재현됐다.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2004년 히말라야 등반 중 숨진 후배 산악인 박무택 대원의 시신 수습에 성공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감행한 목숨을 걸었던 구조 원정으로 큰 울림을 주었다.

엄 대장은 충청매일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엄흥도 선생의 충절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영월 엄씨라 해마다 엄흥도 선생의 시제를 지내러 영월에 갑니다. 역사 이야기를 알고 영화를 보니 감회가 남다르더군요"

그는 특히 엄흥도의 선택을 깊이 존경한다고 했다.

"삼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시대였는데도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지킨 것이죠. 옳은 일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엄 대장은 히말라야에서 후배의 시신을 수습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설명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였습니다. 형제처럼 지낸 사람인데 그 시신을 절벽에 매달린 채 둘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다며 만류했지만 결국 계획을 세워 실행했습니다"

그는 산에서 말하는 ‘의리’의 의미도 덧붙였다.

"산에서는 함께 오른 동료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기본입니다."

500여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사람. 한 사람은 조선의 충신으로, 또 한 사람은 히말라야의 산악인으로 기억되지만 ‘사람을 끝까지 지키는 마음’이라는 가치는 시대를 넘어 같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엄 대장은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도 직접 관람하며 "영화를 보면서 단종의 삶과 당시 시대 상황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런 역사 속에서 엄흥도 선생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단종의 유배지였던 강원 영월도 각광받고 있다. 영월 청령포·장릉의 올해 누적 관광객 수는 8일 기준 11만명에 육박했다. 지난해 6월에야 10만명을 넘어섰던 것과 비교하면 급증한 것이다. 

<이 기사는 충청매일신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