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더위가 사그라들었다. 가을이 왔음에도 모른척 시치미떼며 이글거리던 태양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곡식을 영글게 하는 적당한 볕과 바람에 마음 밭이 느긋해진다.
풍성한 계절에 '배부른산'을 다녀왔다. 강원도 원주굽이길 1코스 구간으로 원주시 무실동과 흥업면 경계 해발 437m의 야트막한 산이다.
포복산, 배부릉산, 식악산(食岳山)이란 이름도 있다.
예전 원주에 홍수가 나면 문막 쪽의 배를 이 산에서 불렀던 데서 연유했다는 이야기, 산 모양이 만삭의 임산부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공존한다.
원주시청 뒷편 주차장이 출발점이다. 안내판을 살피며 오늘 찾아갈 길을 익힌다.
봉화산 정상에서 가마바위, 배부른산을 오른 뒤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면 8㎞ 남짓 되겠다.
출발지점에는 화장실과 발씻는 곳, 에어건, 해충기피제가 나란히 있다. 걷기 도시를 지향하는 원주시의 노력이 돋보인다.
들머리에는 '봉화산 둘레길 산철쭉 화단은 익명의 기부자 도움으로 조성되었다'는 안내석이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아낌없이 주신 분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봉화산에는 곧장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비롯해 둘레길 코스로 어울림길과 담소길도 있다.
요즘 트렌드인 맨발로 걷는 이들이 많다. 푸른빛과 마주한 볕이 숲을 선명하게 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잎이 눈부시다. 도심 가까운 곳에 있어 시민들이 즐겨찾는 인기쟁이 산이다.
푹신푹신한 흙길이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걷지만 시끄럽지 않다. 대부분 맨발로 느긋하게 걸으며 소곤소곤 이야기 한다. 서두르는 사람도 없다.
풀벌레 소리, 새소리에 귀를 쫑긋하니 숨이 고르게 된다. 고운 숨결이 정신을 맑게 해준다. '아! 좋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사이에 참나무와 밤나무가 쭉쭉 뻗어 있다. 길에는 밤송이와 도토리가 즐비하다. 가시돋친 밤송이는 빈 껍질 뿐인데 도토리는 풍년이다. 알밤은 사람들이 주워가니 도토리만 다람쥐 차지다.
도토리가 알밤만하다. 탐스런 가을의 정서(情緖)부자가 된다. 흙을 뚫고나온 나무뿌리가 세월을 말해준다. 나무뿌리가 근사한 계단이다.
봉화산 꼭대기에 도착했다. 운동장 같은 정상에는 봉화정이란 정자와 여러가지 운동기구가 마련되어 있다.
산이 높아지자 풀벌레소리가 잠잠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소리를 따라가니 나무틈으로 발아래 중앙고속도로가 보인다.
차들이 도로를 쌩쌩 달리지만 이곳은 여유롭고 한적하다. 별천지가 따로 없다.
봉화정에서 쉬고 있는 가족이 눈에 들어온다.
아빠를 따라 온 형제가 기특하다. 배낭안 달달한 간식들이 형제의 손을 바쁘게 한다. 나도 덩달아 주머니속 미니 초코바를 꺼내 먹었다.
가마바우를 향해 출발한다.
숲길 중간중간 전시하는 원주 출신의 국민 작사가 박건호님의 시(詩)는 오솔길이 못다한 이야기를 대신 전해준다. 시(詩)는 걸음을 멈추게 한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다. 이 가을과 딱 어울린다.
평평한 숲길에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다. 가마바우가 늠름하다.
가마바우는 모양이 가마(탈 것)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마바우 뒷편으로 전통 보료같은 납작한 바위가 눈에 띈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의 정성이 담긴 돌탑이 이색적이다.
이제 배부른산 정상까지 1.9㎞ 남았다.
더욱 깊어진 소나무숲은 바람이 더해져 향기롭다.
숲을 이루는 소나무는 아버지 같고 참나무와 밤나무는 어머니 같다. 어릴적 자다깨서 무서운 생각이 들때 아버지 코고는 소리는 자장가였다. 아침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마솥 앞에서 나를 향해 팔벌려 주시던 어머니의 품이 떠오른다.
나무계단이 나타났다. 무릎보호를 위해 계단옆 흙길을 택했다. 천천히 호흡하며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푹신한 흙길을 원없이 걷는다.
돌부리가 아닌 나무뿌리에 걸려 주춤하게 된다. 그만큼 나무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겠다.
하얀 구절초가 가을을 맞아준다.
배부른산 정상석이 눈앞에 보인다.
인증샷 후 탁트인 앞을 내다보니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모두 내 손에 들어온다.
저 멀리 치악산도 선명하게 보인다. 구름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깊은 심호흡을 하며 정상에서의 여유를 누린다.
해가 뉘엿뉘엿 진다.
깊은 푸른빛이 홍해가 된다.
해지는 시간을 확인하고 등산용 스틱을 꺼내 안전하게 내려간다. 하산할 때는 보폭을 줄여 천천히 가는게 좋다. 숲의 이야기에 속도를 맞췄다.
석양이 등 뒤를 지켜준다. 밤을 준비하는 숲속은 고요하다. 한낮을 장식하던 산새와 풀벌레는 깊은 밤 찾아올 산짐승에게 숲을 내어줄 준비를 한다.
해가 졌음에도 간간이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맨발로 어둑해지는 흙길을 천천히 우아하게 걷는다.
도심과 가까워지자 찌르찌르찌찌르 풀벌레 소리가 소란스럽다. 화려한 네온사인에 밤을 잊은 풀벌레의 합창이 끝날 줄 모른다.
자동차로 꽉 찼던 주차장이 텅 비었다. 사람이 떠난 숲은 원래 주인들이 나와 분주하게 움직일 것이다.
세상이 점점 빨라진다. 복잡한 일도 많다. 그러나 어차피 우주의 주인공은 나. 맘 먹기 달린것 아닌가! 틈나는 대로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걸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