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재 할아버지는 본가 마님에게 세 남매가 있었다. 아들 둘에 막내는 딸이었다.
큰아들이 백납병이 걸렸지만 두뇌가 우수하여 공부를 꽤 잘하였다. 마님은 남편의 매독으로 한쪽눈이 썩어 더 이상 신체에 붙어있질 못하자 서울로 갔다. 일본인이 하는 안과에서 수술을 하고 의안을 박았다.
이미 괴사 된 눈알은 빼버렸다. 그 자리를 도려내고 소독한 다음 다른 곳으로 전이를 막으려 독한 약을 썼다는 말이 있었다. 그게 수은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로 인해 한쪽 얼굴이 퍼렇게 되었다. 의안은 다른 쪽 눈과 완연히 달라 튀어나와 있었고 전혀 신경이 없는 인공 눈알이었다.
그래도 다른 한쪽 안구는 살릴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담배를 피우면서 통증을 가라앉혔다. 집에 몰래 양귀비를 키워 양귀비잎과 뿌리를 달여 먹으며 통증을 완화시켰다.
일단 쑥갓씨를 뿌려 쑥갓을 키운다음 그 그늘에 양귀비씨를 뿌리면 잘 보이질 않았다. 장독대 옆 그늘에 조금 심었다.
단속에 걸리면 양귀비를 심은 이유로 감옥에 갈수도 있었다.
매독은 1기, 2기는 별 통증이 없지만 림프선이 붓고 구내염이 심하며 입안에서 냄새가 많이 난다. 마님은 늘 담배를 물고 살았으며 은단을 구해서 주머니에 넣고 씹었다.
궤양이 가장 먼저 생기는 곳은 생식기였다. 여성으로서 생식기의 궤양을 드러내놓고 치료하기도 힘든 시절이다. 속곳과 속바지 속치마 겉치마로 싸맨 한복을 입는 시절이다.
가려움증이나 농도 심하였다. 어두운 밤이 되면 우물 뒤꼍에서 불을 피웠다. 달구어진 화로에 숯을 도자기에 넣고 사람들 눈을 피해 쑥뜸을 하였다.
두어시간 앉아있으면 한결 농이 진득해지고 나아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쾌는 없었다. 평생을 매독균에 점령을 받으며 살아간 한 많은 인생이었다.
마님은 쑥뜸을 하며 하늘에 별을 바라보았다. 죽은 묘향이가 부러웠다. 의안을 박고 백납병인 큰아들과 아직 어떤 증세는 없지만 불안한 남매를 혼자 키울 것을 생각하니 장대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첩의 자식도 짐이었다. 만석꾼 집으로 시집올 때 누구나 부러워했던 마님이었다. 밤마다 남편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지만 이를 악물고 살아내리라 다짐을 했다. 자식이 힘이 되었다.
장남인 영규는 착하고 여섯 살이 지나자 천자문을 띄고 경성공립보통학교를 보냈더니 전교 1등을 하였다. 마님은 아예 집안일은 오래된 집사에게 맡기고 큰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공부를 시켰다.
경성공립보통학교는 일제가 세운 학교지만 사대문 안에 좋은 가문의 자제들과 일본인 아이들이 혼합해 있었다. 가끔 일제에 반항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일본어로 수업은 했지만 한국인 교사들은 몰래 한국인 아이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다행히 백납병은 눈에 띄게 퍼지지 않아 긴팔을 입히면 놀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망하여 해방이 되었다. 일본학생들은 거의 떠나고 한국학생들이 한국어로 공부할 수 있었다.
후에 영규는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하였다.
본가에는 15살 된 영규 동생 성규와 막내딸 미자가 있었다.
성규는 영규와 다르게 인성이 비뚤어져 있었다. 자신을 하늘같이 섬기던 머슴들이나 여종들도 자신의 아버지를 욕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매독균이 퍼진 집이라든가 빨갱이 집이라든가 그런 손가락질에 분노하였다.
거기다 자신의 엄마가 형에게 쏟는 교육열이 불쾌하였다. 형과 두 살 차이지만 형이 방학 때 오면 일부러 시비를 걸어 주먹질을 하기도 하였다. 성규는 배다른 어린 동생 두 명을 괴롭히는 일에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벌써부터 개천가밑에 울도 담도 없는 집에 몰래 들어가 여자애들을 겁탈하였다.
자신에게 흐르는 매독균을 온세상에 전염시키고 싶었다.
동규와 운규가 묘향이의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와 엄마를 동시에 잃은 첩의 자식을 살뜰히 보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유난히 두 아이들은 엄마를 닮았다. 인물이 뻬어나 어른들은 혀를 차면서 안 됐다는 말만 하였다.
동규는 어린 운규를 지키지 못했다. 일곱 살 많은 큰집 형이 무서웠다. 그 야비한 눈으로 웃으며 촛불로 자신의 손가락을 지지거나 화로에 있는 불타는 숯을 손으로 직접 집어 자신의 넓적다리에 대거나 하는 잔인함을 보이는 형이었다.
만약 동생편을 들거나 했다가는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그리워 늘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형 눈을 피해 다녔다.
동규는 머슴들 틈에서 밥을 얻어먹거나 미자누나가 오면 붙어다녔다. 어린 운규는 혼자서 늘 고통을 당했다. 큰엄마인 마님은 자신의 아들이 묘향이 아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을 보고만 있었다.
하루는 미자가 학교를 다녀온 다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니 장롱 안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장롱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얼름 문을 열어보니 여섯 살 동규가 갇혀 있었다.
아마 둘째 성규의 짓이었으리라. 아이를 가두어 놓고 나가서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미자는 그 당시 여중생이었다. 얼른 아이를 꺼내 씻기고 먹을 것을 주었다.
“누나 무서워. 누나 무서워.” 동규는 미자를 보고 벌벌 떨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님은 큰아들에게 식모를 딸려놓고 다시 본가로 와서 머슴들과 농사를 짓는 것을 지시하거나 커다란 포도밭을 경작하였다. 어쨌든 재산은 지켜야 했다.
묘향이의 두 아들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보는 데서는 학대를 하였다. 묘향이가 매독을 옮겨온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묘향이가 좋아했던 호박떡을 그 아들들도 좋아했다. 그러나 마님은 호박떡을 해서는 묘향이 아들들은 자고 있다고 한 개도 주지 않았다. 식모가 몰래 한 개를 숨겨서 묘향이 아들 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제 강점기 보리고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조선인들은 굶고 매 맞고 고통 속의 하루하루였다.
하지만 만석꾼의 집안에서는 보리고개라 해도 밥은 굶지 않았다. 적당히 공납을 하면서도 머슴들도 떠나지 않고 함께 일하였다. 독립한다 해도 다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마님은 영리하였다. 사람들을 부려야 큰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므로 베풀 줄 알았고 도리를 알았다. 본가 앞마당에는 똥개를 몇마리 길렀다. 잔반들을 먹여 키 웠고 머슴들은 한여름에 두들겨 패서 잡아먹었다.
하지만 마님은 먹지 않았다. 일본인이 자신의 의안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라 했지만 개의 눈과 너무나 흡사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묘향이 큰아들이 실종된 것은 이때 여름 쯤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