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영규. 그는 머리도 좋았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릴 때 부터 귀티가 났다. 
영규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백납병은 평생 아킬레스 건이었다.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처형당한 것은 법대를 갈 수 없는 원인이기도 하였다.
백납병으로 몸에 드문드문 보기흉한 흰 반점이 있었지만 아버지를 닮아 훤칠한 키에 콧날이  오똑한 미남형이었다.

4.19 혁명은 서울대 학생들이 주도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다 학생들이 사망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제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전국적으로 번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영규는 건축학과 학생회 간부로 시위에 앞장서기도 하였지만  아직 잡히지는 않았다. 
다만 특무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늘 위험에 시달렸다. 여름에도 팔을 가리는 옷을 입어야 했기에 집에서 부쳐오는 돈으로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유복한 가정에서는 방석하나도 천을 끊어다가 직접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경찰이 쳐들어와 하마터면 잡힐 뻔하였으나 다행히 화장실에 있어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영규는 자신의 하숙집으로 가는 도중 거기에도 잠복 경찰이 있었다. 영규는 갈 곳을 잃었다. 

학교 강의는 고사하고 이제 잡히면 극심한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 다. 
아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동대문 포목점 근처에 자신도 모르게 내리게 되었다. 
그날은 옷감을 사러 간 게 아니라 경찰눈을 피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간 것이었다. 

단골 포목점엔 주인은 없었고 빼어난 미모의 여대생인듯한 아가씨가 있었다. 
예전에도 한두 번 본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도 있을까? 포목점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파리의 연인’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과 닮아 있었다. 

아직은 이른 짧은 핫팬츠를 입고 긴 머리에 헤어밴드를 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양복천을 보러 왔나요?” 영규에겐 그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리는 듯했다.
“아 예. 예” 말을 더듬으며 영규는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그녀는 이화여대 오드리 헵번 정수진이었다. 포목점집 외동딸, 사실 서울대생도 다 알고 있는 이화여대 퀸카였다. 

하지만 영규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미팅이나 연애를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고 민주화 투쟁에 온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사막에서도 선인장 꽃은 피고, 전쟁터에서도 봄은 오고 있는 것이다. 
초여름이라 살랑거리는 바람에 가슴 쪽이 벌어진 수진의 블라우스는 깊은 골을 보이고 있었다. 영규는 귀까지 빨개져 엉거주춤하다. 수진은 그 모습을 즐기듯이 가까이 오면서 여러 가지 천을 보여주었다. 

영규는 천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거나 고르고 값을 치렀다. 천을 받아서도 그대로 서있다가 수진이가 활짝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 또 봐요” 하니 그제서야 발길을 억지로 돌리고 양복점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걸어가다 전봇대에 숨어 수진이를 또 볼수 있을까 하여 서성이다 돌아섰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동대문에서 남산 쪽으로 걸어가니 허름한 집들이 있었다. 
제대로 된 하숙집을 구하면 누군가 신고를 하지 않을 까하여 조그맣게 ‘방 있음’이라고 쓰인 집으로 들어갔다. 

노부부가 살고 있고 사랑방에 세를 주려 했다. 일단 수진이의 포목점과 가까웠다. 인상이 좋은 영규를 보고 노부부는 오늘부터 묵으라고 하였다. 
그 방은 사실 그 전날 사람이 죽어 나간 방이라 아무도 동네에서 오지 않았다. 

영규는 밤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와 남산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이미 봄꽃들은 지고 밤하늘에 푸른 나무들이 팔을 벌리고 서있었다.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는 없지만 어머니가 시루떡을 두말이나 해서 동네를 돌리고 춤을 추셨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투쟁 속에서 이승만을 적으로 하고 민주화를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남산의 밤은 한적했다. 더러 젊은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희희낙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어디선가 여자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남자는 여자에게 사정을 하고 여자는  반항하는 듯한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어둠 속에 낮에 자신을 홀렸던 포목점 오드리 헵번이 어떤 남자가 껴안으려 하자 발버둥 치며 빠져나오려 하는 것이었다. 

영규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역기를 하면서 다져진 체력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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