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생활은 아이스크림 한 개를 혀끝에 녹일 만큼 짧은 것이라 했던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남짓 달콤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영규는 한때 그토록 예뻐 보였던 수진이가 몸치장에 사치를 부리는 모습이 점점 싫어졌다.
만삭이 된 몸으로도 매니큐어를 바르고 술을 마시는 그녀가 조신하지 못해 보였다.

반대로 수진이는 처음엔 멋져 보였던 영규가 늘 긴팔 옷만 고집하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이 불만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숨기는 것인가.

어느 날 아침, 수진이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영규 씨, 당신 몸의 하얀 반점… 혹시 무슨 병이 있는 건가요? 아기에게도 영향이 가는 건 아닌지 걱정돼요.”
“이건 멜라닌 색소 부족으로 생긴 거요. 전염도 안 되고, 아무 문제 없으니 괜한 걱정 말고 집에서 조신하게 몸조리나 하시오.”

영규는 자신의 병을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수진이가 불쾌했다.
언젠가 스스로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려 했는데, 마치 약점이라도 잡은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며칠 뒤, 영규는 양복 단추 하나가 떨어져 화장대 밑으로 굴러 들어간 것을 보고 자로 꺼내다가 그곳에서 담뱃갑을 발견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식모가 피웠을 리는 없고, 수진이라고 직감했다. 평소 은근히 풍기던 담배 냄새가 떠올랐다.

그날 저녁, 수진이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영규를 보고 놀랐다.
“어머, 영규 씨, 일찍 들어왔네요. 금순이한테 얼른 밥 차리라 할게요.”
영규는 굳은 얼굴로 담뱃갑을 내밀었다.
“이게 뭐요? 임산부가 담배를 피운다는 게 말이 됩니까?”

수진이는 깜짝 놀란 척 잡아뗐다.
“미쳤어요? 제가 담배를 피웠다고요? 술은 가끔 마셔도 담배는 절대 안 피워요.”
그러며 영규를 끌어안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믿어줘요, 응?”

아직은 수진이의 애교가 통하던 시절이었다.
아기도 곧 태어나고, 괜히 몰아붙여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영규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식모 금순이는 여덟 살 무렵, 그의 고모 손에 이끌려 이 집에 들어왔다.
다 떨어진 코르덴 치마에 한겨울에도 홑겹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손등은 동상으로 터지고 얼굴도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영규 어머니는 불쌍히 여겨 거두어 들였고, 그날 이후 금순이는 부엌일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식모들과 함께 잠을 자야 했다.
나이 많은 식모들은 밥 중에도 괴롭히고, “참을 해와라”, “부엌 청소해라” 하며 부려먹었다.

금순이는 눈물을 삼키며 열다섯 살까지 견디다가, 영규가 결혼한 뒤 서울 신혼집으로 따라오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새 세상을 얻은 듯 기뻤지만, 작은마님 수진이의 심술은 더 심했다.
수시로 집을 비우며, 본가에서 전화가 오면 둘러대게 했다.
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꼬집기까지 했다.

영규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오히려 금순이에게 다정했고, 가끔 주전부리를 사 먹으라며 용돈도 쥐여주었다.
금순이에게 영규는 하늘 같은 존재였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백납병 등으로 군 면제를 받은 영규는 일에 파묻혀 있었다.
서울 북창동 일대의 한옥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과 그 하수인들이 구색을 맞춰 지은 것이었지만,
요즘은 강남에서도 그 한옥양식을 원했다.
게다가 서양식 건축이 들어오면서 철근과 콘크리트 건물이 쉴 새 없이 올라갔다.
영규는 수도권은 물론 지방에서도 이름난 건축가가 되어 있었다.
집에 머물 시간이 없었다.

그는 한때 금순이에게 수진이의 담배 문제를 넌지시 물어볼까도 했지만, 결국 차마 그러지 못했다.
영규는 본디 남을 다그치거나 의심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규 어머니가 머슴 하나를 데리고 서울 신혼집을 향했다.
전화를 해도 늘 며느리가 없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다.
새로 도정한 쌀과 고기, 북어포 등을 꾸려 봇짐을 지게 하고 올라왔다.
역시나 수진이는 부재중이었다.

금순이는 큰마님의 등장에 깜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금순아, 작은마님은 어디 갔느냐?”
“친, 친정에 가신다고 하셨어요, 큰마님.”
“그 몸으로 어딜 그렇게 다니는지... 친정에 전화 좀 넣어보아라.”

하지만 수진이는 친정에 없었다.
사실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친구들과 카바레에 있었다.

“우리 며늘아기가 친정에 갔다던데, 바꿔 주시겠어요, 사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 수진이가 잠이 들어서요. 일어나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수진 어머니는 황급히 신발을 신고, 딸이 자주 간다는 카바레 몇 곳을 돌아다녔다.

한 구석에서 맥주를 마시며 웃고 있는 수진이를 발견하고, 시어머니가 집에 왔다고 말했다.
“수진아, 시어머니 오셨다. 어서 집에 들어가야지. 아이고, 술 냄새는 또 왜 이래?”
정신이 번쩍 든 수진이는 사탕을 와그작 씹으며 신혼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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