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간 수진이는 그곳을 천국처럼 느꼈다. 여자도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이유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이민을 가거나 불법체류를 했다. 한국인들은 피폐한 조국을 떠나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교회라는 조직 안에서 신앙을 연결고리로 서로 돕고, 장사하며 생활했다.

돈 없이 온 사람들에게 교회는 잠자리와 식기까지 빌려주고 쌀이나 식량을 제공하며 신도를 만들었다. 타국에서 한국인끼리 의지하며 살아갔지만, 그 안에도 여러 폐단이 있었다. 한 한국 여성은 24시간 마트를 운영하던 중, 돈을 훔치려던 흑인 고등학생에게 맞아 사망했다. 상대는 덩치가 크고 돈을 빨리 주지 않자, 영어로 “너희가 우리 흑인 마을에서 장사해 돈을 가져가니 도둑이다”라고 말하며 폭행했다. 누군가 그 장면을 보았더라도 한국인이었기에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수진이의 친정은 그녀가 이혼 후 미국으로 가는 일이 창피했지만, 돈을 충분히 제공하며 아는 사람을 통해 초청 이민으로 영주권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에는 만 명도 채 안 되는 한국인이 악착같이 노력하며 살았다.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왔어도, 돈이 없고 영어를 못하면 인종차별이 심해 세탁소, 빌딩 청소, 닭 공장 손질, 네일 아트 등 백인 조직에서 꺼리는 일을 해야 했다. 수진이는 자신의 명의로 마트를 하나 사서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며 교회에서는 멋쟁이로 소문이 났다. 딸 인애는 별도로 영어를 배우며 좋은 학교에서 공부했다. 얼굴이 희고 예쁜 인애였지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왕따였다.

수진이는 금세 교회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다. 교회에서 만난 멋진 남자와 결혼했지만, 그는 영주권을 위해 수진과 사기 결혼을 한 뒤, 딸이 태어나자마자 영주권을 받고 떠났다. 인애는 갑자기 일곱 살 정도 차이 나는 여동생을 얻은 셈이었지만, 아버지 없는 아이를 잘 돌봐주었다.

수진이는 이후 연하의 미국인 남자와 재혼했으나, 남자는 골프장을 차려놓고 수진이에게 가게를 맡기며 돈만 챙겼다. 결국 다시 이혼했다. 결혼과 이혼이 반복되는 가운데, 다행히 한 남편이 위자료를 많이 주어 수진이는 술과 담배, 골프, 그리고 여러 남자들과의 즐거운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수진이는 돈의 힘으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식 생활만 했다.

인애는 어머니와 달리, 더러운 연못의 연꽃처럼 청초하게 자랐다. 한국의 아버지가 보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연락을 막았다.

인애는 몇 살 아래 남자아이 진구를 만났다. 진구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공무원이었으나, 미래가 암울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왔다. 가진 것이 없는 진구네 가족은 새벽까지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학교에서는 백인과 흑인 아이들에게 폭행을 당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폭행이 기다렸다. 형 철구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려 동생을 때려야 했다. 이미 마약에 손을 댄 철구와 달리, 진구는 그렇지 않았다.

진구는 맞아 엉망이 된 얼굴을 엄마에게 보이지 않으려 소파에 천으로 덮곤 했다. 자신을 때리는 형을 미워하지 않았다. 집에 와도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모두 넣고 끓이곤 했다. 엄마는 맛있다며 찌개 끓이는 법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고, 진구는 그때부터 가족을 위해 밥과 반찬을 준비하는 법을 익혔다.

진구는 공주처럼 예쁜 인애를 만나 마음속이 환해졌다. 미국 아이들에게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았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수진이는 진구가 인애에게 관심 있다는 것을 알고, 집안일을 모두 시켜 마음껏 부렸다. 태풍이 오기 전에는 집안 창문을 닫고, 장작 패기부터 집안일까지, 진구는 행복한 마음으로 해냈다. 수진이가 흑인들을 고용하면 한국인이라 무시하고 바가지를 씌우기도 했다.

진구는 은연중에 인애와 결혼까지 생각했다.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구타와 폭력, 학업 부족으로 절망할 때도 인애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축일부터 배달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배고픔이 일상이었지만, 인애를 생각하면 행복했다.

인애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수진은 진구가 학벌이 없다는 이유로 인애를 의사에게 시집보냈다. 진구는 큰 상실감에 이틀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착한 진구는 인애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참았다.

진구는 밤마다 인애 집을 찾아갔다. 고요한 밤하늘에 별은 가득했지만, 인애는 없었다. 공허함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중,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 리나를 만났다. 어머니와 미국에 와 열심히 살고 있는 그녀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한국인이었다.

진구는 리나의 착하고 성실한 모습에 끌렸고, 어느 날 물었다.
“리나, 나를 사랑하는 거 맞지?”
리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잊지 못할 여자가 있어. 그래도 괜찮을까?”
“나는 신경 쓰지 않아. 지금의 네가 좋아.”

리나와 진구는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리나는 미국에서 공인중개사로 성공했고, 진구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건축진단사로 신뢰를 얻었다. 일 년에 한 번 집의 안전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진구는 인애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 남편은 의처증으로 악독하게 인애를 괴롭혔고, 수진이는 딸의 괴로움을 눈감았다. 

진구는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파도 너머로 인애의 얼굴이 넘실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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