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규는 아침에 국밥 한 그릇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커스단을 나섰다. 서커스 단장은 동규에게 30원을 주었으나 수원에서 천안까지의 버스가 없었다. 수원역에서 천안역까지 기차를 타야 했다. 서커스 단장도 지리를 자세히 알 수는 없어 대략으로 길을 가르쳐 주었다.
동규는 큰길을 따라 기차역을 찾아 헤매었다. 작은 길로 들어서니 산길이었다. 혹시 걸어서 갈 수 있으면 30원을 아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솔길을 걸어가다 목이 말라 개울에서 물을 먹고 얼굴과 손을 씻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눈처럼 복사꽃이 떨어지고 동규의 얼굴에도 쏟아졌다.
울창한 녹음이 하늘을 향해 있고, 한 줄기 따스한 햇살이 동규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햇살은 엄마의 미소처럼 포근하고 밝았다. 동규는 나무 그늘에 잠시 앉아 졸았다. 꿈속에서 엄마가 나타났다. 엄마는 넓은 팔로 동규를 감싸며 "동규야, 아프지 마. 엄마가 항상 너를 지켜줄게. 아무 걱정하지 마." 동규는 엄마의 품에서 흐느끼며 "엄마, 날 좀 데려가줘"라고 울부짖었다. 한참을 땀을 흘리며 엄마를 부르자 어떤 아저씨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야 인마 너 누군데 여기 있니? 여기는 호랑이도 나오는 위험한 곳이야. 지금은 낮이라 동물들이 없지만, 늑대가 나타날 수 있어. 빨리 집으로 가야 해." 그 아저씨는 얼굴과 손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따뜻했다. 동규의 접힌 팔에서 고름이 흐르는 것을 보고 아저씨가 말했다. "넌 문둥병이 있구나." 동규는 매독에 걸린 엄마의 영향으로 피부가 짓무르기 시작한 시기였다.
접힌 부분부터 먼저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규는 두려움에 떨며 아저씨의 붕대를 감은 손을 힐끗 바라보며 "천안으로 가야 해요. 제 집이 거기인데 기차역을 못 찾겠어요"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천안에 문둥병 마을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데, 배는 고프지 않니?"라고 물었다.
동규는 "배고파요."라고 대답했다. 아저씨는 붕대를 감은 손으로 동규의 손을 잡고 밥 먹으러 가자며 이끌었다. 동규는 집으로 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왠지 아저씨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십여 분쯤 걸어가자 집 모양으로 만든 움막 몇 채가 보였다.
아저씨와 동규가 한 움막으로 들어서자 아주머니와 딸아이가 있었다. 그들도 얼굴 일부와 팔을 붕대로 싸매고 있었다. 동규를 보자 놀라며 물었다. "여보, 이 아이는 누구예요?" 아저씨가 대답했다. "우리와 같은 병인 것 같은데 멀리 나와버렸나 봐. 일단 밥을 먹읍시다." 작은 솥을 걸어 만든 부엌과 방은 좁았지만 그래도 살림살이가 대략 갖추어져 있었다. 보리밥에 된장국과 짠 무장아찌, 그리고 달걀을 아저씨 앞에만 놓았다. 아저씨는 찐 달걀을 잘라 동규 밥에 놓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아저씨는 동규에게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동규는 아저씨와 한방에서 이불을 펴고 잤다. 동규는 남의 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아저씨는 동규의 옷을 살짝 들추어보고 여기저기 짓물러 터지는 피부를 살펴보았다. 한센병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마을에 거주하게 하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얼마나 천하게 대접받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한센병의 잠복기는 상당히 길었다. 때로는 10년 이상 지속되어, 어린아이들은 증상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성장하면서 발현되곤 했다. 동규의 경우는 매독의 초기 증상과 유사했고, 피부가 짓무르는 과정도 한센병과 비슷했다.
다음 날 아침, 동규는 아침밥을 먹으며 아저씨에게 자신의 처지를 대략적으로 털어놓았다. 동생이 있고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으며, 큰집에서 겪었던 서러움과 본가 형의 잔인한 학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아마도 동규가 한센병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집에 가기 싫다면 여기서 함께 살아도 좋다고 따뜻하게 말했다. 딸 하나만 있어 늘 허전했던 그는 아들을 갖고 싶어 했던 터였다.
사실 아저씨는 미군부대에서 막일을 하고 있었다. 한센병을 숨기고 미군들이 폐기해야 할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등을 처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일꾼들은 폐기 대상 물건들을 한국인들에게 몰래 넘겨 팔곤 했는데, 유통기한이 얼마 지나지 않은 물건들은 여전히 쓸 만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의 이름은 이정섭으로, 사실 군대 내무반에서 3년간 좁고 밀집된 공간에서 생활하며 한센병에 걸렸다. 한센병은 전염성이 매우 낮은 질병이었고, 가족들에게도 잘 옮지 않았지만, 열악한 군대 환경에서 서로 몸을 비비며 좁게 생활하다 보니 감염되었던 것이다. 이정섭은 제대 후 일부러 미군부대에 접근해 일자리를 찾았는데, 페니실린 등 항염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밤일을 자처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미군들에게 영어도 배우고 페니실린도 얻어냈다. 당시에는 미제로 모든 것이 통하던 시대였기에, 미군들에게 잘 보이면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었다.
동규는 아저씨가 좋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