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기를 겪던 영화계에 설 연휴 개봉한 화제작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 1위를 기록중이다.
이제는 안방에서도 명화를 즐길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극장에서 흥행한 영화도 거실에서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세상이다. 한때는 영화를 보러 다녔지만, 시골로 내려온 뒤로는 시내 갈 일이 생길 때 가뭄에 콩 나듯 한 편씩 보다가 그것마저 뜸해졌다. 영화는 어느새 관심 밖의 영역이 되었다.
이번에도 큰딸이 “영월 청령포가 배경이니 꼭 보라”며 예매해 주겠다고 했지만, 귀찮다며 사양했다. 그래도 다시 전화가 와 “꼭 가보라”고 재촉한다. 단양에도 작은 영화관이 있으니 경로 6천 원이면 된다며 예매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큰딸의 간곡한 부탁에 남편과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2024년 7월 개관한 그곳은 지날 때마다 “우리 영화 보러 오자”고 말만 했던 곳이다. 1관, 2관으로 나뉜 신축 건물은 깔끔했고, 영화관뿐 아니라 전시관과 도서관이 함께 있는 복합문화시설이었다. 지금껏 외면하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오면 자주 찾게 될 것 같았다. 흥행 2위라는 ‘휴민트’도 와서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 청령포. 스크린에 펼쳐지는 강물과 절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비극의 현장을 더욱 처연하게 만든다.
역사 속 단종은 열다섯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로 유배되었고, 끝내 비운의 죽음을 맞은 조선의 임금이다. 실록에는 사약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는 이 지점을 다소 각색한다. 죽음을 둘러싼 방식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구성해 극적 긴장을 더한다.
특히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인물로 알려진 엄흥도를 중심에 세운 설정이 인상 깊다. 실제 역사에서 엄흥도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둔 충신으로 기록된다.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사람의 인간적 교감을 상상해낸다.
‘유해진’이 연기한 엄흥도는 해학과 서민적 온기를 지닌 인물이다. 무겁기만 할 수 있는 비극 속에 민초들의 숨결과 웃음을 불어넣는다. 또한 영화 속 단종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나약한 소년 군주’라기보다, 백성과 어울리고 글 모르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자애롭고 강단 있는 임금으로 재해석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상상의 영역에 가깝다.
죽음의 장면 역시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와는 다소 다르다. 역적의 손에 능욕당하듯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믿는 엄흥도의 손에 마지막을 맡기겠다는 설정은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장면은 권력의 잔혹함보다 인간적 의리와 비통함을 전면에 내세우며 관객의 감정을 깊이 흔든다.
이 영화는 역사를 충실히 재현했다기보다 ‘기록 너머의 마음’을 복원하려 한 작품에 가깝다. 역사는 사실의 영역이지만, 영화는 해석과 상상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단종의 비극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 죽음은 권력 다툼 속에서 희생됐다는 점이다.
영월의 강물은 지금도 흐른다. 그 물결 위에 우리는 기록된 역사와 상상으로 빚어진 이야기를 함께 떠올린다. 영화는 약간의 허구를 안고 있지만, 그 창작을 통해 오히려 ‘단종’이라는 이름을 다시 불러내고 한 인간의 외로움과 충절을 생각하게 만든다.
슬픈 역사 위에 덧칠한 상상이지만, 극장을 나서는 길에 나는 단종이 애잔해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월은 새해 연휴부터 영화 흥행 1위 덕분에 단종 유배지 청령포와 영월 장릉의 관광객이 다섯 배로 늘었다고 한다. 지역에는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