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니 달콤했던 신혼이 먼저 떠오른다.
나의 신혼은 시댁 별채에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친정에서 혼자 지낼 때보다 식구들이 북적북적한 것이 좋았다.

이북 사람인 친정에서는 보리밥을 먹으면 방귀 나온다며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경상도 댁으로 시집오니 보리밥에 된장을 보글보글 끓이고, 열무 겉절이에 고추장을 넣어 비벼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시부모님은 남편이 형보다 먼저 결혼해 처음 맞은 며느리라 어쩔 줄 모르고 예뻐하셨다.
시어머니는 호강만 하다 시집온 며느리가 고생할까 애처로워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놓으셨다.
그때는 이불도 빛바랜 광목에 풀을 먹여 다듬질을 반들반들하게 한 뒤 손수 꿰매주셨다.
맛있는 것은 나만 몰래 챙겨주시며 그렇게 이뻐해 주셨다.

그러나 막내딸로 혼자 자란 나는 예절(禮節)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었다.
세상에 어려운 사람이 없어 편하게 대하다 보니 시누이와 시동생을 이름에 ‘아~’를 붙여 불렀다.
시아버지는 보기가 민망하셨던지, 남 보기도 그러니 호칭을 바로잡으라 하셨다.
동네 앞뒤 집을 드나들며 살던 나는 ‘아가씨’, ‘도련님’이라는 말이 죽어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식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고모, 삼촌이라는 호칭을 썼다.

남편은 신혼 때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기세였다.
출근했다가 퇴근할 때면 마누라가 보고 싶어 뛰어오곤 했다.
나물도 다듬어주고, 수도가에서 발이라도 씻으면 방까지 업어주었으며 연탄도 갈아주었다.
내 옷 다림질도 해주고, 휴일이면 개울에 함께 가 빨래를 했다.
빨래를 마치고 벌건 대낮에 반쯤 벗고 목욕도 했다.
동네에서는 홀랑 벗고 목욕한다는 소문이 풍성했다.
그때는 세상에 우리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부끄러움이 없었다.

당시는 인견 공장에 다니던 처녀들도 밤이 되면 개울에서 목욕하던 시대였다.
남편은 내 월남치마도 만들어주고, 시동생 교복 바지까지 지어줄 만큼 재봉 솜씨가 좋았다.
그 재주는 시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불 때서 밥하는 게 안쓰러웠는지 출장비를 아껴 처음 나온 석유곤로를 사 왔다.
불을 붙이고 심지로 화력을 조절해 쓰는 것이 신기했다.

출장을 다녀오면, 식구들이 워낙 많다 보니 내 옷만 사다 주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동생이 수학여행을 다녀오며 가족들 선물을 모두 사 오고 우리 둘 것만 쏙 빼놓았던 적도 있다.
어린 마음에 형이 형수만 챙기는 게 얼마나 섭섭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우리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달달한 신혼을 지나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 보니 나라고 힘든 날이 없었을까 싶다.
자존감이 무너질 만큼 견디기 힘든 서러움도 있었고, 죽을 만큼 힘든 날도 있었다.

우리 가족의 행복이 우연만은 아니다.
수많은 날들을 인내하며 서로를 존중했고, 자식들에게도 사랑으로 대했다.
그러니 자식들도 부모를 존경하고 효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참고 견디며 하나님이 주신 분량만큼의 행복과 불행을 함께 감당해 온 삶이 지금은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
때로는 남편과 자존심 싸움으로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게 부부다.

남편은 평생 가족을 위해 애쓰고 희생해도 퇴직하고 나면 종이호랑이 신세가 되어 아내의 눈칫밥을 먹는다.
나는 남편과 아버지의 자리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최대한 잘해주려고 애를 쓴다.
정열이 사그라들면 아내에게 잘해주는 게 가장 확실한 재테크라는 말이 실감난다.

남편도 황혼이 되어서야 철이 드는지 평생 가족을 위해 고생한 아내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바라본다.
요즘 남편들은 거의 신혼 때처럼 잘한다더니 우리도 비슷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수많은 날들을 인내하며 손을 놓지 않고 묵묵히 견뎌왔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남편이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맘은 평온하다. 지금의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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