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와 처서가 지났지만 더위는 여전하다.
지난 27일 용추폭포가 있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랑산으로 향했다.
해발 647m 사랑산은 제당골에 있다고 해서 원래 이름은 제당산.
사랑산으로 개명한 뒤 입소문을 타면서 산꾼들이 즐겨찾는다. 주변에 개명한 분들이 있는데 사랑산처럼 기쁜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다.
제당산은 어떻게 사랑산이 될 수 있었을까?
살아도, 죽어도 같이 하자는 운명적 사랑의 대명사 연리지가 그 주인공이다.
용추폭포 근처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는 과정에서 융합되었다. '괴산의 20명산' 책자를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지역 산을 알려온 괴산군이 연리목을 발견하고 곧바로 이름을 바꿨다. 남녀가 이곳을 지나가면 백년해로 한다고 하니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렸다.
사랑산은 높지 않지만 육산과 암릉이 적절히 섞여 있다. 멋진 계곡과 폭포에서 산행 마무리를 할 수 있으니 마지막 피서 산행으로도 제격이다.
방문자가 청천면 사기막리 용추슈퍼를 찾아가면 마을에서 운영하는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비는 대형버스 1만원, 승용차 5천원이다.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주차장은 벌써 꽉찼다.
그런 와중에도 관광버스의 행렬은 계속된다. 사랑산의 명성을 알 수 있게 했다.
햇살이 따갑다. 제대로 땀흘릴 각오를 하고 첫 발을 내딛는다. 오늘 걷기는 용추슈퍼를 출발해 코끼리바위~사랑바위~사랑산 정상~용추폭포~용추슈퍼로 되돌아오는 4.8㎞이다.
평균 3시간~3시간 30분 소요된다고 하지만 느긋하게 걷기로 했다. 임도를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니 우측으로 등산로가 보인다. 바로 오르막이다. 푸른 숲과 단짝인 흙길을 걷는 동안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져 멋진 합주곡을 들려준다.
동그란 풀잎은 물방울을 그려놓은 듯 생동감이 넘친다. 땀이 비오듯 흐르는데 한줄기 바람이 위안이 된다.
흙길에 떨어진 덜익은 도토리가 가을임을 알려준다. 도토리가 누렇게 익을 때 푸른 숲도 알록달록 눈부신 자태를 뽐내리라!
오늘 산행은 더위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완만한 흙길과 울퉁불퉁 바위길이 반복된다.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좋다. 흙길이 지루할 때쯤 나타나는 암릉은 어린시절을 소환한다. 또래보다 키가 컸던 나는 높은 곳에서 쉽게 오르내리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어깨 쫙 펴고 의기양양했던 어린 나처럼 바위를 씩씩하게 올라갔다.
'영차영차' 속마음의 구령소리에 무겁던 발걸음이 가뿐해진다.
나무로 빽빽한 푸른 산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그 뒤로 펼쳐진 검은 빛 산줄기가 먹으로 그려 놓은 그림이다.
전망좋은 곳마다 산악회 멤버들이 차지하고 있다. 왁자지껄하다. 탁 트인 풍경은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나오게 한다.
좁은 공간에 북적이는 인파를 보니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던 고향집이 떠오른다.
할머니 생신이나 명절때 모이던 친척들, 마냥 좋았던 그 날의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늘 어째 부실하다." 산악회 리더인듯한 중년 남성이 헉헉거리며 오르는 내게 말한다. "제가 아니구요, 일행 분은 저기 뒤에서 쉬고 계세요", "아! 우리 회원이 아니구나" 처음 보는 사람 눈에도 내 상태가 영 시원찮은가보다. 폭염과 장마를 핑계로 산 보다는 평지를 걸었던 후과라 생각한다.
아뿔싸!
무거운 발걸음에 땅만 보고 올랐더니 코끼리바위를 놓쳤다. 그래도 얕은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등푸른 벌레를 만나서 생환을 응원했다. 떨어진 솔방울에서 활짝 피기전 장미와 만개한 국화 등 모양찾기 놀이도 즐거웠다.
어느덧 금방이라도 데구르르 굴러 내려갈듯한 사랑바위 앞에 멈춰섰다. 파란 하늘 아래 미동도 없이 버티고 있는 바위에서 강인함을 느꼈다.
이제 정상까지 1.3㎞ 남았다.
등산객마다 땀범벅이다. 맨발로 산을 오르는 이들도 보인다.
바위를 마주할때마다 신중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바위틈을 살피며 천천히 발 디딜곳을 찾았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운 몸을 식혀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은 바람이 불 때마다 냉감을 더해준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부착된 안내문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크게 튼 라디오나 음악소리 누군가에게는 큰 불편일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동시에 안내문을 걸기위해 나무가지에 감은 철사가 나무를 불편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드러운 재질의 끈이 있었다면 철사를 제거하고 다시 작업했을텐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진걸 보니 정상이 코 앞이다. 한 눈에 쏘옥 들어오는 앙증맞은 정상석이다. '사랑산' 이름과 정상석이 찰떡궁합이다.
정상석 인근에는 먼저 온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허기를 달래고 있다.
평평해서 누군가 쉬어갔을 법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얼음물을 꺼내 갈증을 달랬다.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 산행은 단당류와 전해질이 포함된 이온음료를 마시는 것이 좋다. 사탕과 과일을 먹었다. 체력을 회복하고 배낭을 꾸려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진 내리막길이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등산 스틱으로 체중을 분배했다.
그나저나 오늘날 사랑산을 탄생시킨 연리지가 보이지 않는다. 1인용 좁은 나무계단을 내려오자 거기에 버티고 서 있다.
모습을 드러낸 천연보호수가 위풍당당하다. 쭉 뻗은 매끄러운 소나무가 둘인듯 하나가 되어 모습을 뽐낸다. 소나무 둘레로 안전시설이 설치되어있다.
조금 내려오니 용추폭포 안내판이 나온다. 안전요원 두 분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용추폭포와 마주했다. 오래 전 익사 사고 발생 후 이곳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폭포수의 웅장함이 눈과 귀로 전해진다. 소리만으로도 더위를 식힐 수 있다.
물깊이가 대단하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청량감이 땀에 젖은 몸을 산뜻하게 한다. 물에 발이라도 담가야겠다는 생각에 용추폭포를 벗어나 물놀이가 가능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먼저 온 사람들이 많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바위에 걸터앉아 시원함을 느끼며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나무소리를 느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보고 있으니 거미가 물에 빠진게 아니고 즐기는 듯 했다. 물결에 몸을 맡기고 물 방향대로 헤엄치고 있으니까. 거미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내 방식대로 사람과 사물을 단정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오후가 되자, 녹음이 물방울처럼 계곡에 떨어진다. 경쾌해진 물소리에 맞춰 발장구치며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물멍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되서야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빼곡하던 주차장은 어느새 텅 비었다.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가득차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내릴 기세다. 서두를 법도 한데 사랑산이 주는 너그러움 때문인지 여유롭다. 어차피 젖은 몸, 비가 내린다면 시원하게 맞아주자.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 찾은 사랑산은 넉넉한 마음을 안겨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