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 쏟아지던 비가 지나가니 연일 폭염 소식이 전해진다.
11일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십승지 연하계곡을 찾았다.
십승지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ㆍ전염병ㆍ전쟁이 없다는 길지를 뜻한다. 연하계곡은 영월군 망경대산과 응봉산 사이에 자리하며 '정감록' '남격암 산수 십승보길지지'  '징비록' 등에서 천하명당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늘 걷기는 연하계곡~응봉산~연하계곡 원점회귀 코스다. 응봉산(1013m)은 영월의 명산 중 하나다. 숲이 우거져 한낮에도 어두컴컴하다.
시원한 조망을 기대하는 산꾼들은 응봉산을 거쳐 남쪽 덕가산까지 남북으로 종주하거나, 동서 두위지맥을 따라 종주한다.

그러나, 오늘 나의 목적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물에서 땀을 식히는 것이니 응봉산 정상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연하계곡 입구에 주차한다. 좁은 일차선 도로는 나무그늘과 시원한 계곡물소리로 가득하다.   
선명한 푸른빛과 거센 물줄기는 산행 이후를 기대하게 한다. 

계곡 옆에는 온통 차량이다. 차들끼리 피하라고 만들어준 공간도 주차장이다. 천천히 오른다. 날이 무덥고 습할 때는 심호흡이 중요한 법. 인터넷 소개글에 나온 산들농원 펜션 앞 빈터는 차박 공간이 됐다. 시원한 산속, 계곡 옆 차박은 생각만 해도 부럽다. 

등산로 표지판을 따라 응봉산으로 향한다. 첩첩산중 시골마을의 고요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대문 밖에 자리잡은 장독대가 호위무사가 되어 집안을 지켜준다. 

시골길을 장식하는 야생화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참나리가 이렇게 이쁜 줄 미처 몰랐다. 줄기 가득 새까만 씨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내년에도 참나리가 풍년이겠다. 산간지대 임에도 들판이 넓다.
콩, 들깨, 땅콩, 옥수수 등 없는게 없다. 

연잎만한 호박 잎에 입이 쫙 벌어진다. 이렇게 큰 호박잎은 난생 처음이다. 

민가가 끝나자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악회의 노란리본이 길잡이가 되어준다. 우거진 숲길 나무와 풀이 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다. 쓰러진 나무와 바위에 이끼가 가득하고, 작은 날벌레들의 윙윙거림에 신경이 곤두선다.

뾰족한 맘이 최대치에 이르렀을 때 순간 맑고 깨끗한 산새소리가 들린다. 귀뿐 아니라 온몸이 정화된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의 수풀은 더 진한 초록빛을 띤다. 시각적으로 시원함을 더해준다. 

돌틈으로 이끼가 많아 방심하면 미끄러진다. 물을 가득 먹은 나무도 밟으면 안된다. 이런 저런 긴장감에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며 좋으련만. 그래도 푹신한 흙길이 지친 나를 위로해준다. 

산허리쯤 오르니 윙윙 귓가를 멤돌던 벌레소리가 사라진다. 산새들의 합창소리에 어깨를 들썩인다. 알록달록한 버섯이 푸른 여름 숲을 화려하게 장식 한다. 

숲향기에 취해 아무생각없이 걷고 있던 중, 생각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목줄없는 검은 개 두마리가 나를 향해 돌진한다. 들개인가? 공격태세를 갖추려는 그순간 개 주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요. 안물어요." 
딱봐도 대형견이다. 주인의 무책임한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에 화가 났지만,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더이상 방해받고 싶지 않아 생각을 멈췄다. 텔레비전에서 본듯한 "우리개는 안물어요"란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도 났다. 

길목마다 쓰러진 나무가 많다.  어릴적 친구들과 하던 말뚝박기 놀이가 떠올랐다. 나무 앞에 다가가서 "가위 바위 보"를 해봤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늘이 사라지면서 임도가 나타났다. 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눈부시다. 임도 건너편으로 연결되는 산길부터 정상까지 360m 남았다. 

비탈길에 등산로도 희미하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하늘을 올려보니 울창한 숲 속 하늘은 우물처럼 깊다. 

걸음을 멈추고 가뿐 숨을 내뱉으니 숲 향기가 가슴을 꽉 채운다. 들쑥날쑥했던 호흡이 제자리를 찾았다. 묵묵히 다시 걷는다. 

키큰 나무를 지나자, 뜨거운 태양을 홀로 맞고 있는 키작은 응봉산 정상석이 반갑게 맞아준다. 조망은 없지만 정상석 아래 울창한 숲을 향해 야호! 외쳐본다. 뿌듯하다.

정상석 옆 평평한 그늘길에 자리를 잡고 간식거리를 꺼냈다. 하산해서 시원한 계곡물에 발담그고 먹으려고 했는데 계획 변경이다. 습한 비탈길을 올라오면서 에너지를 많이 사용했다. 산행할 때 음식물은 몸에 신호가 오기 전 섭취하는게 중요하다.

오늘은 얼음물이 보약이다. 뜨거운 속이 시원해졌다. 한숨 돌리고 땀도 식히니 몸이 제자리를 찾는다. 기운이 난다. 배낭을 정리해 하산한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등산용 스틱을 사용한다. 미끄러운 길은 내려올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정오가 되니 숲속의 나무들이 반짝인다. 선명한 초록빛깔이 피로감을 덜어준다. 해기 중천에 떠서인지 계곡 곳곳에 사람들이 꽉 차 있다. 어른도 아이도 표정이 밝다.

나도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맨발을 물 속에 담갔다. 땀냄새 밴 윗옷도 벗어 헹궈 널었다. 여름 산행은 바로 이맛이다. 

장마철 큰 물이 나가서인지 계곡은 수량도 풍부하고 깨끗하다. 맨발로 걸어보니 자갈에 지압이 된다. 납작한 돌이 눈에 들어와 손에 쥐니 곱돌이다. 어릴 때 돌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던 그 요술쟁이다. 평평한 바위에 사선을 그으며 추억을 꺼내본다.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웃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평화롭다. 유리알같이 맑은 물 속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조망없는 습한 비탈길, 갑자기 나타난 대형견 두마리는 머리속에서 사라졌다. 시원하다 못해 몸이 서늘해졌다. 쉬던 자리를 정리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며 오늘 걷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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