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묫길은 가도 가도 마음의 짐이 덜어지지 않는 회한의 길이며 또한 삼백리 길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토지의 효율적인 사용을 핑계 삼아 이 나라의 산이라는 산은 전부 묘지가 되겠다는 탄식을 쏟아 낸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의 필연성을 부르짖는 모양이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다. 내게 남겨진 날들이 몇날 며칠인지 알 수 없으나 일 년에 두 번 가는 성묘가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는가. 한 줌의 가루로 만들어 바람을 따라 보내고 산으로, 바다로 여행이나 다닐 염치도 없거니와 모처럼의 연휴랍시고 휴양지에서 며칠 호사를 부린다고 그들처럼 행복할 것 같지도 않겠기에 그렇다.

나의 할머니는 아버지가 미처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청상과부가 되셨다. 할아버지가 일제강제 노역장으로 끌려 가셔서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생이별을 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지금의 러시아령인 사할린이라는 섬에서 탄광 일을 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한쪽 다리를 잃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고 싶으니 뱃삯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고향땅으로 보내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돈을 세상 어디에서도 융통할 수 없었다. 남편을 찾으려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아비 없는 자식들을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이집 저집 급전을 구하러 다녔지만 힘없고 가난한 젊은 과부에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그러다 8.15 광복을 맞았고 사할린은 뱃삯이 있어도 오고 갈 수 없는 공산, 소련 땅이 되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올 길이 막혀버린 할아버지는 조금이라도 고향 가까운 곳에서 살다 죽겠노라고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북송선을 타셨다는 것이다.

그날부터 할머니의 반닫이 함 속에서는 배 삯을 보내달라던 할아버지의 편지가 반백년을 할머니의 한숨소리를 켜켜이 삭히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친정 오빠가 호랑이처럼 무서웠다는 증조할머니의 눈을 피해 할머니를 재가시키려고 무던히 애쓰시긴 했다고 한다. 몇 번이나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만나고 돌아가셨지만 그 뿐이었다. 오히려 눈치가 빠르신 증조할머니의 눈 밖에 나 20년이나 친정에도 가지 못하고 더욱 더 호된 시집살이만 하시게 되었다.

그런 할머니는 고생 끝에 낙이란 속담을 잘 믿지 않으셨다. 어린 자식들이 눈에 밟히고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가지셨겠지만 그래도 남편 덕 없는 사람은 자식 덕도 없다는 속담을 더 믿고 사셨다.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종국에는 쉰 넷 된 아들을 암으로 먼저 보내고, 간병인으로 따라다니던 며느리마저 교통사고로 잃고 말아 당신의 말년을 어서 빨리 죽기를 소망한다는 말과 함께 사셨다.

그런데 의사는 직장암이라고 했다. 수술을 하면 완치될 확률도 많다고 했다. 다만 환자가 고령이라서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늦은 밤까지 아내와 상의했다. 아내는 말이 없었다. 칠순을 앞두신 고모와도 상의했다. 고모 역시 내 결정에 따르겠다고만 하셨다. 병원비를 내가 낸다는 이유로 모든 선택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성공하면 장수 하시는 거고 실패하면 6개월만 더 사시는 거였다. 그리고 나는 가난했다.

고민 끝에 나는 6개월만 사시는 방법을 선택했다. 우습게도 사실만큼 사셨다고 생각했다. 가난이란 핑계를 방패삼아 저승에 가시면 그토록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만나실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결정한 요양병원 생활은 의식주를 제공하고 아프지 않게 진통제만 놓아주는데 1개월에 70만원이었다. 6개월간 할머니는 젊은 나도 한 번에 먹기에는 부담이 가는 분량인 색색의 진통제를 한 움큼씩 드셨다. 치료제인지 아시고 정성껏 드시는 모습을 차마 마주보기 힘들었다. 점점 나아지는 것 같다고 좋아하시던 목소리가 문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고 다람쥐처럼 귓가를 맴돌다 피딱지처럼 굳어 귓속에 들어앉았다.

그럴수록 쌓여가는 죄의식에 어서 빨리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나길 바랐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8개월이 지났는데도 아픈 분 같지가 않았다.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2개월이 더 지나자 불안감은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1년이 지나자 무슨 수를 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수소문 끝에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무료 요양시설인 호스피스가 있어 서둘러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부끄러웠지만 현실적으로 월 70만원이라는 돈은 내게 너무 컸다.

그날 할머니는 내게 아무런 말씀도 않으셨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자 고모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한다. 절에 다니는 노인네를 이런 곳으로 데려왔다고 역정을 내시다 그날따라 약도 드시지 않고 지쳐 잠이 드셨다. 그리고 끝이었다. 거짓말 같이 병원을 옮긴 바로 그날 모든 것이 끝났다. 나의 현대판 고려장이 끝난 것이다.

그세 강산은 마치 두 날 마냥 두 번이나 바뀌었다. 세월은 달리는 열차처럼 흘렀다. 죄책감을 싣고 달리는 세월의 열차 좌석은 끝없는 상실감으로 결코 안락하지 못했다. 성당으로 달려가 고해성사를 해도 조금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고 할 만큼 했다는 주변의 위로도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제와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이렇게 삼백 리 성묫길이나 묵묵히 다니는 것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화장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는 것인가.

 

길을 가다 무심코 밟히는 이슬방울 하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에겐 더없이 소중한 인연이다. “푸드득”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소리마저 다시 만나고 싶은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다들 살아가지 않는가. 살면서 인연이란 소중함을 아는 사람에게만 소중하게 지켜지는 법이다. 더욱이 가족으로 만난 그 소중한 인연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다면 나처럼 뒤늦게 후회하고 남은 삶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사람에 따라 삼백 리 성묫길이 십 리 같은 사람도 있고 십리 성묫길이 삼백 리 같은 사람도 있으리라. 나의 삼백 리 성묫길 역시 절대로 십리 같지는 못하다. 그렇다고 천리처럼 느껴지는 길도 아니다. 그저 걸을 수 있는 힘만 남아 있다면 계속해서 떠나야만 하는 운명의 길 일 뿐이다. 그 길이 하루해가 모자라는 고행길이 되더라도 계속해서 나는 떠나야만 한다. 올 설날에도, 내년 설날에도 그리움을 안고 계속해서 나는 삼백 리 성묫길을 떠날 것이다. 한 가닥의 햇살과 또 한 가닥의 바람소리를 인연삼아 성묫길을 떠날 것이다. 사할린에서 고향마을까지 배 삯을 마련해 들고 가는 심정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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