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도 많다고 아우성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장려금을 지급하고 있지만 좀처럼 출산율이 올라가지 않고 있다. 얼마간의 금전적인 이익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엊그제까지 산아 제한 만이 잘사는 길이라 외치다 다시 다산장려금이라니 모양새도 우습다. 따지기 좋아하는 어떤 기자는 우리나라에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날이 멀지 않다고 극단적인 계산까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사회분위기와 다르게 자식이 셋이다. 그렇다고 정부정책에 잘 따르는 사람도 아니고 멀리 내다보는 사람은 더 아니다. 어느 날 불쑥 복덩어리 셋째가 찾아왔을 뿐이다. 피임 하느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다며 아내는 울상이었지만 나는 돌아서서 쾌재를 불렀다. 그때 나는 퇴직 같은 것은 피부로 느끼지 못하던 나이라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라 여겼다. 주변에서는 국가에 충성한다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부자 아빠라고 빈 인사도 건넸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영어학원에 등록했을때 일이다. 저녁밥을 먹다 말고 학원 선생님께서 영어로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브라이언'이라고 자랑을 했다.
"그래? 그럼 네 친구 ‘규형’이는 뭐라 지어주셨니?"
"걔는 '토마토'에요"
"토마토? 에이 설마 '토마스'겠지"
"아니에요, 걘 나더러 '브라자'라고 부르는 걸요?"
녀석의 대꾸에 밥풀이 튀도록 웃어대는 내게 남들은 며느리 본다고 초대장을 보내오는데 걱정도 안 되냐고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자식 많아야 무슨 소용이냔 말을 자주 듣는다. 말년에 뭔 고생이냔 위로의 말도 듣는다. 힘들기만 하고 돌려받지 못하니 정신 챙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무엇을 바라 자식을 키우던가? 자식을 키우면서 들인 공은 이미 키우면서 다 보상받는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에 뿌듯했고 재롱떠는 모습에 즐거웠지 않은가. 일가를 이뤄 늘 시끄러웠고 저녁마다 행복충전을 받았으니 족하다. 산다는 것은 시끄럽게 울고 웃는 일상일 것. 외로워서 힘든 것 보다 넘쳐 부딪히는 소리가 더 좋다. 물질적인 것은 내리사랑이니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줄 때 더 행복한 이 사랑을 무엇으로 바꿀까.
어려서는 넘어질까 안절부절도 했었고 좀 더 자라서는 의미 없는 받아쓰기 성적에도 사람구실을 못할까 걱정도 했었다.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키웠더니 나중에 크면 아빠같이 얼굴이 변할까 두렵다는 섭섭한 말도 들었다. 그러면 어떤가. 자식 키우는 행복은 즐거울 때만 느끼는 게 아닌데. 노심초사하는 한 아비의 마음도 사실은 행복이다.
이제 나이 육십이 넘어 생각이 실용적인 나는 말 많은 개그프로나 허무맹랑한 만화영화 같은 것에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여러 관심사를 공유하고 싶다.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아버지를 둔 녀석이 신경 쓰이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사실은 그런 고만고만한 일상이 나로서는 행복하다. 자식 키우면서 생기는 문제는 고민이라 여기면 고민이고 행복이라 여기면 행복이리라. 누가 뭐래도 나는 셋이라서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