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고향 시골마을에서는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지 못했다. 대부분의 반찬이 초식이라 그런지 영양실조가 흔했으며 원기소라는 영양제가 유행했었다. 아주 가끔 동물성 기름을 섭취할 기회가 있기는 했다. 어느 집인가 초상을 치르거나 회갑잔치 같은 것을 할 때였다. 그때마다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모두 그 집 마당에 모여 놀았다. 음식을 만들던 어머니나 할머니와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운 좋게 전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까해서다. 영락없이 놀란 위장이 일으키는 반란으로 배탈이 날게 뻔했지만 그러면 어떤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먹고 보는 거다. 그래서 비석치기나 자치기 같은 놀이를 하면서도 언제 나의 어머니가 불러줄 것인지 마음은 온통 콩밭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와 조금 달랐다.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좀처럼 날 불러주지 않아서다. 별 수 없이 나는 염치불구하고 전을 부치는 어머니 옆자리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버리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전을 자르고 남는 꽁다리를 몰래 주시며 집에 가서 먹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달랐다. 전을 챙겨 주시는 모습이 참 통이 컸다는 기억이다. 굳이 음식 하는 곳을 배회하지 않더라도 치마폭에 큰 덩어리로 싸주시며 집에 가서 동생들과 먹고 또 오라고 하셨다. 음식을 대하는 스케일의 차이인데 나로서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집에서 계란을 나눠주던 모습에서도 할머니는 스케일이 달랐다. 당시 5마리 정도의 닭을 항상 키웠는데 매일 2개 정도의 알을 낳았다. 식구는 여덟인데 알은 두 개라 부족했다. 그래서 가장인 아버지께 한 개를 드리고 나머지는 주로 연장자인 할머니께 드렸다. 아니면 가끔 계란탕을 만들어 같이 먹거나 형제들 중 생일이거나 아픈 사람에게 주시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 차지였던 계란을 언제나 내 밥 속에 덮어 주셨다. 밥을 먹다 말고 계란 노른자가 나오면 여동생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좋기만 했다. 누군가 그 계란을 먹어야 한다면 당연히 손자의 몫이었고 손녀들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배당하는 할머니 모습이 그때나 지금이나 내 눈에는 정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할머니는 내게 관한한 유독 통 큰 여인이었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스무 해가 넘었다. 불공평하게도 내게만 통이 크셨던 나의 할머니, 그때마다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쳐 공정하지 못하셨던 분, 그런 할머니가 갈수록 그립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분명 사리판단이 깊어지는 것일 텐데 유독 손자에게만 이유 없이 관대하셨던 보성<오>씨 <희>자 <월>자 할머니에게 추석차례상에서 제주자격으로 한 말씀 드렸다.

"할머니! 저도 곧 할아버지 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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