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논리는 정의가 아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십오 리 산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우리 마을은 첩첩산중, 말 그대로 하늘 아래 첫 동네였다. 학교가 있는 풍촌 마을은 시냇물이 흐르는 제법 넓은 평지였다. 학교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먼 산골에서 오는 아이들을 ‘촌놈’이라 부르며 놀리고 무시하곤 했다.
전교생이 200명이 조금 넘는 작은 학교였다. 우리 반도 고작 서른다섯 명이었다. 같은 학년이라 해도 나이는 제각각이었다. 정시에 입학한 나보다 네 살 많은 학생이 두 명, 세 살 위가 세 명, 그리고 한두 살 많은 학생이 여럿 있었다.
덩치로 보나 힘으로 보나 나는 반에서 중간에도 들지 못했다. 공부도 운동도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연년생 두 여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을 거들다 보니 결석도 잦았다. 가끔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꾸중을 듣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런 나를 학교 옆에 사는 ‘창섭’이라는 아이가 자주 괴롭혔다.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소리가 날아왔다. “야, 촌놈! 이리 와 봐!” 닳아빠진 노란 고무신과 기워 입은 옷은 좋은 놀림감이었다. 귀갓길에서도 괴롭힘은 이어졌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마을에서 온 아이들도 그의 장난감이 되기 일쑤였다. 딱지나 고무줄, 나무로 만든 새총 같은 놀잇감도 심심하면 빼앗아 갔다. 그는 그야말로 학교의 ‘왕초’였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피하려 했지만 그는 집요했다. 그렇다고 맞설 용기도 없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덩치도 훨씬 컸다. 태권도장에 다니며 빨간 띠를 맸고, 위에는 6학년 형과 이미 졸업한 형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이미 겁부터 먹고 늘 당하고만 있었다.
4학년 2학기 개학날이었다. 그날도 창섭이는 어김없이 나를 불렀다. 여름방학 동안 못 했던 일을 한꺼번에 만회라도 하듯 태권도 발차기까지 하며 나를 때렸다. 그날 처음으로 이대로 계속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분을 삭이며 혼자 앉아 있었다. 문득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마음속으로 싸움을 연습했다.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한 방을 날릴지, 어린 머리로 방어와 공격을 수없이 그려 보았다.
이튿날이었다. 오후 첫 시간을 마치고 운동장가에 서 있는데 예상대로 창섭이가 다가왔다.
“야! 촌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뜻밖의 반응에 그도 잠시 당황한 듯했다. “이것 봐라? 어디서 째려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어 피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오른손 주먹이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갔다.
다음 순간, 그는 운동장에 큰 대자로 쓰러졌다. 마치 지금 텔레비전에서 보는 종합격투기 KO 장면처럼 단 한 방이었다. 더 이상의 싸움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너무 세게 때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몰려들고 선생님들이 달려왔다. 창섭이는 잠시 후 깨어났고, 나는 교무실로 끌려갔다. 괴롭힘을 당해 왔던 사정을 설명했지만 종아리는 회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억울하지는 않았다. 두려움과 통쾌함이 묘하게 뒤섞인 마음이었다.
학교가 끝난 뒤 불안한 마음으로 정문을 나서는데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나를 불렀다. 창섭이의 큰형이었다. “왜 우리 동생을 때렸냐?”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창섭이가 태권도 2급이다. 다시 한 번 붙어 볼래?”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두덩이가 퉁퉁 부은 창섭이는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두 번 다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그가 쓰러지는 장면을 많은 아이들이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왕초’ 노릇도 자연스레 끝이 났다. 그때까지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학교는 다시 평온해졌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 중동의 불길을 보면서 그 일이 떠오른다. 힘을 믿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모습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반복되는 것 같다. 골목에서도, 학교에서도, 때로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벌어진다. 힘이 곧 정의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 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단단한 저항 앞에서 멈추게 된다.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벌어졌던 그 짧은 싸움이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는 말처럼, 세상에는 아무리 약해 보여도 끝내는 버티고 일어서는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승리는 정의의 편이고 잘잘못의 평가는 훗날 역사가 바르게 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