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의 남도여행 1박2일-
가을에 떠나려던 순천·여수 여행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다가 초겨울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지난번 서울 나들이는 내가 먼저 제안했지만, 이번 여행은 아내의 말 한마디에 곧바로 계획을 세웠다. “순천이랑 여수는 꼭 한번 가보고 싶어.” 그 말에는 오래 묵혀 둔 바람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장거리 여행일수록 기차가 편하고 창밖 풍경을 함께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계획만 잘 세우면 비용도 아낄 수 있다. 잠자리는 여수 밤바다를 즐기려고 항구 근처에 미리 예약해 두었다. 여행은 늘 그렇듯 떠나기 전 설렘이 가장 달콤하다.
순천과 여수를 함께 선택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아내가 오래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라는 점, 둘째는 투병으로 인해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와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놓쳤다는 아쉬움, 그리고 셋째는 1948년의 아픈 역사인 ‘10·19 여순사건’을 마음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즐거움과 기억을 마주하는 일이다.
12월 19일 아침, 주덕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오송역에서 KTX로 갈아탔다. 고속열차는 풍경을 눈에 담기도 전에 사라질 만큼 빠르게 남쪽으로 내달렸다. 공주, 익산, 전주, 남원, 곡성을 지나 두 시간이 흐른 뒤 여수엑스포역에 도착했다. 먼 길 남쪽 끝까지 왔음에도 시게는 11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새로 지은 역사는 넓고 단정했다. 광장 너머로는 세계박람회장의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러낸 도시답게 여수는 차분하면서도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역 앞에서 ‘낭만버스’라 불리는 시티투어버스를 탔다. 경로우대를 받아 요금은 2500원. 하루 동안 여수의 주요 관광지 8개소를 순환한다. 우리 같은 노부부에게 더없이 고마운 이동수단이다. 2층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으니 바다와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실감이 났다.
오동도를 거쳐 이순신광장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돌았다. 음식문화특화거리를 기웃거리며 식당메뉴판을 들여다봤다. 모두 아귀탕, 서대회, 장어탕으로 비슷했지만, 한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들어왔다. ‘복춘식당’. 번호표를 받아 한참을 기다린 끝에 나온 아귀탕은 붉은 빛의 매운탕이었다. 경상도식 맑은탕과는 또 다른 칼칼함이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오후에는 이순신광장과 거북선, ‘진남관’을 둘러보았다. 400년 전, 목선으로 바다를 누비며 나라를 지킨 장군의 위대한 삶을 떠올리니 바닷바람마저 숙연하게 느껴졌다. 다시 낭만버스를 타고 돌산도를 돌아 엑스포역으로 돌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 우리는 여수 시내를 천천히 걸었다. 중앙동을 지나 수산시장의 한 생선회집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줄돔과 갯장어를 섞은 생선회회, 서대회무침, 그리고 소주 한 병. “이 맛에 여행 오지.” 아내의 한마디에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밤이 되자 여수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돌산대교에서 거북선대교까지 손을 잡고 걷는 동안 불빛은 물결 위에서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낭만포차 거리의 웃음소리, 하늘과 바다를 잇는 해상케이블카의 불빛, 부둣가에서 묵묵히 낚싯대를 드리운 또래 노인들… 여수의 밤바다는 말없이도 ‘낭만’이라는 단어를 증명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무궁화호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에서는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했다. 첫 목적지는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였다. 초겨울의 송광사는 단풍이 사라진 대신 고요와 깊이가 남아 있었다. ‘무소유길’을 걸으며 법정스님의 큰 가르침이 떠올랐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내려놓는 연습이 더 필요해진다는 진리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내와 사진 한 장 남기기 위해 낯선 이에게 부탁했다. 예전 같으면 쑥스러워 피했을 일이지만, 이제는 다르다. 사진은 지금의 우리를 남기는 일이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면 충분하다.
순천만습지는 말 그대로 장엄했다.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과 갯벌, 철새들의 쉼터는 겨울이라 더 깊고 묵직했다. 화려함 대신 질서와 생명이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늙는다는 것은 저런 풍경을 닮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찾은 순천만 국가정원은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꽃은 많지 않았지만, 내년을 준비하는 땅의 숨결이 느껴졌다. 성탄절에 때맞춰 만든 ‘산타가든’과 ‘윈터빌리지’가 지난 세 계절의 아쉬움을 대신해 주었다. 산타열차와 회전목마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남쪽에서 흘러간 1박2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겨울 낭만을 담기에는 충분했다. 순천과 여수는 풍경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았다. 그 기억 한가운데에는, 천천히 걸으며 같은 방향을 바라본 노부부의 시간이 있었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마음은 더 깊어졌다. 우리 부부는 황혼의 길목에서 또 하나의 따뜻한 시간을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호수정원 봉우리에서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곱게 익어가자고 약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