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에 샘물을 파다-

필자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할 당시 가톨릭 신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경찰조직에 경찰 신부를 위촉하는 등 복음전파에 헌신했다.
필자는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할 당시 가톨릭 신앙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경찰조직에 경찰 신부를 위촉하는 등 복음전파에 헌신했다.

아주 어렸을 때 이모님 댁에 놀러가서 며칠간 개신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 이때 배운 찬송가를 지금도 꽤나 많이 알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통일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 여러 곳을 찾았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내는 1986년 창원의 반송성당에서 영세를 받았고 두 아들도 유아영세를 받았다. 유독 가장인 나만 비신자였다. 주일이면 아내와 아이들을 자동차로 성당에 태워주고 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데려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가장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성당으로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교리공부를 시작하여 6개월 후인 19991년 4월 19일 영세(세례명 크리스토폴)를 받았다. 직장 여건상 레지오나 봉사단체에서 크게 활동하지는 못했다. 주일 미사만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과제를 주셨다. 그것은 경남지방경찰청 내에 가톨릭 뿌리를 내리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2002년 경남지방경찰청 경무과에서 근무할 때였다.

전국의 경찰관서에는 1986년부터 경찰관 정서함양과 유치인 교화선도의 목적으로 경승 경목 위촉 운영제도가 있었다. 즉 관서별로 불교의 승려와 개신교의 목사 3~4명을 위촉하여 종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경승’ ‘경목’이라고 호칭했다. 그러나 유독 가톨릭(천주교)만은 그렇지 않았다.

천주교가 경찰조직에 뿌리 내리지 못한 이유를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이런 것 같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에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전교할 당시 유교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많은 신자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했다. 특히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이후 조정과는 극한적인 대립관계가 지속되어 왔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과정을 거치면서 다른 종교에 비하여 민주화 투쟁이나 현실정치 참여가 많았다. 역대정부로부터 호의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특히 경찰 내부에서는 ‘정의사회구현 사제단’을 비롯한 일부 사제들의 각종 시위참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소위 골치 아픈 종교단체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시국사범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했다.

경찰 신자들도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겉으로 드러내기를 꺼렸다. 천주교 신자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문민정부 출범이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였다. 간부들이나 관리자들이 눈치를 살피느라고 가톨릭 전교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것들이 천주교가 경찰조직에 들어오지 못한 요인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여 경찰청 훈령을 개정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톨릭신자였기에 가능했다. 기존의 경승 경목에 ‘경신’을 추가했다. 즉 가톨릭이 경찰조직에 전교할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먼저 경찰청과 수도권 경찰관서에서부터 경찰신부를 위촉하기 시작했다. 성당과 경당을 신설하여 점차 활성화 되어갔다.

그러나 지방은 이보다 훨씬 늦었다. 2002년 3월경 당시 경비계장 백광술 경정이 신부님 한 분을 모시고 왔다. 천주교 마산교구청 사목국장 허철수 미카엘 신부님이었다. 신부님은 경찰 신부 위촉 절차를 알아보려고 오셨다고 했다. 신자인 내 소관 업무였기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청 내부규정으로 업무지침이 마련되어 방법이나 절차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쉽고 간단하게 처리할 사항이 아니었다. 우선 결재 라인에 있는 상관들의 종교 성향이 어떤지 살펴야했다.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수월하련만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특히 결재권자인 청장은 겉으로는 무교라고 하지만 불교적 성향이 짙은 사람이었다.

참모들 대부분이 가톨릭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무작정 위촉에 따른 공문서를 작성하여 결재를 받으려다가 잠깐 망설였다. 먼저 의중을 떠 보는 것이 좋겠다는 심산으로 구두 보고를 하니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겉으로는 달다 쓰다 말은 없었지만 속내가 들여다보였다. 청장은 물론이고 검토 단계나 협조 부서 간부들 모두가 신부 위촉을 하지 말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가톨릭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이처럼 경찰은 천주교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워 시위를 주동하는 종교단체로 낙인찍고 있었다. 나는 평상시에도 불교나 개신교에 비해서 천주교를 불평등하게 대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승려나 목사는 되고 신부는 안 된다는 방침이 이해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꼭 경찰신부를 위촉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신자였기에 사명감이 앞섰던 것 같다.기회 있을 때마다 상사들을 설득했다. 아울러 교구청에 지원요청을 했다. 사목국장 신부께서 직접 청장을 방문하여 설득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신부님께서 산다라 수녀님과 함께 책과 조그만 선물을 준비해 청장실을 다녀가셨다. 이런저런 사유로 경남경찰청 신부를 위촉하는데 석 달이나 걸렸다.

우여 곡절 끝에 2002년 가을 경남 경찰 역사상 최초로 경찰 위촉신부가 탄생되었다. 초대 경신으로는 마산교구청 허철수 미카엘 신부님을 위촉했다. 가톨릭 신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경남경찰조직 안에 최초로 경찰신부를 위촉했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컸다. 이어서 또 다른 하나의 큰일을 해야만 했다. 신부님을 모시고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미사봉헌을 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미 불교신자의 경우 4층 우측 끝에 법당을 마련하여 법회를 하고 있었다. 개신교 역시 4층 중간부분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목사가 상주하며 종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20년 전 경남경찰청이 부산에서 이전하면서 신축한 건물은 직제와 직원 수가 늘어남으로 인하여 사무실이 협소했다. 직원들이 불편을 겪는 여건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공소 마련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사들에게 말을 꺼내 보았자 승낙을 얻지 못할 것은 불보듯 뻔했다. 하나같이 불가능하다는 견해였다. 내 스스로 돌파구를 마련해야했다. 청사 내부를 모두 돌아다니며 살펴본 결과 해결책이 떠올랐다. 문서 보존소와 붙어있는 자료실을 조금씩 축소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자료실과 기록물보존소 관리는 우리부서 소관이었기에 추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청사의 일부 개조는 원칙상 청장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그래서 개조 수준이 아닌 범위 내에서 칸막이만 조금씩 옮겼다.

면적 약50㎡(약13평) 규모의 작은 공간을 만들어 냈다. 신자들의 회합용 탁자와 의자는 경리계와 협조, 창고에 보관 중인 물품을 재활용했다. 미사용 제대와 비품은 마산교구청에 의뢰하여 비치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제법 아담한 경당이 완성되었다.

이후에는 숨어 있는 신자들을 찾아내는 일 또한 내가 할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찰 조직의 특성상 신자임을 들어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각 사무실에 공문을 보내 파악했지만 신자는 고작 5~6 명에 불과했다.

500명의 직원을 상대로 2차, 3차 연이어 직간접적으로 개별 접촉하여 총 18명의 신자를 찾았다. 일부는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냉담 신자들이었다. 새로 마련된 경당에서 신부님을 모시고 첫 주일미사를 올릴 때는 감격스러웠다. 점심 식사 후에는 교우들이 회합의 장소로 이용했다. 또 수시로 경당에 들러 기도드리고 마음의 양식을 쌓을 수 있었다.

다음은 전경과 의경 신자들 파악에 나섰다. 창원과 마산에 소재한 기동대와 방범순찰대 그리고 각 경찰서에 공문을 보냈다. 소속 의경들을 대상으로 신자 파악을 하여 주일미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비록 영세를 받은 신자는 아니더라도 전교를 목적으로 미사에 참여 하도록 적극 권장했다. 이미 불교와 개신교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3대 종교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전·의경들의 종교 활동에 큰 관심을 가졌다.

전·의경들 중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신앙에 관계없이 매주 일요일은 종교 활동을 명분으로 참여하는 사례가 많았다. 잠시라도 영내를 벗어나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것이 좋아서 오는 대원들도 있었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전교를 위해서는 어떻든 많이 모이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매주 일요일 아침 출근하여 창원지역의 경찰서 기동대와 방범순찰대에 일제히 전화를 걸었다. 지휘관이나 당직관에게 소속 전·의경들의 종교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당부했다. 상급관서인 지방경찰청의 지침을 잘 따라주어 날로 참석인원이 늘어갔다.

전·의경들에게 나눠 줄 미사용 팸플릿을 직접 만들었다. 대부분 비신자이기에 미사 전례절차를 모른다. 이들에게 맞도록 주요 기도문과 성가를 삽입하고 행동이 묘사된 미사용 팸플릿을 자체 제작 하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사참여 인원이 많아져서 4층 강당으로 주일미사 장소를 옮겼다.

주일마다 4층 강당에 미사집전을 위한 제대를 꾸몄다. 집에 있는 작은아이가 사용하던 키보드 반주기를 기증했다. 교구청과 사파동 성당에 요청하여 반주자와 봉사자를 지원 받았다. 미사를 마치고 전·의경들과 다과회를 할 때의 먹거리는 사파동 성당과 교구청의 지원을 받았다.

미사는 대부분 위촉 신부님께서 집전하셨으며 예외적으로 가까운 사파동 성당 신부님께서 집전해 주실 때도 있었다. 이때 정의사회구현사제단 소속으로 유명한 백남해 요한보스코 신부님을 처음 만났다. 시위현장의 주동자로 경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사제였다. 듣던 바와는 달리 예상 외로 다정다감하시고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불교나 개신교에 앞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4층 강당을 우리 가톨릭이 선점했다. 강당의 관리주체가 나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경남경찰청 강당에서 성가가 울려 퍼졌다.

전·의경들과 미사 후에는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치킨과 피자 등을 먹으며 신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의 호응을 얻어 타 종교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대원들이 미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교리 공부를 실시하여 그해 8명이 영세를 받았다.

모든 면에서 15년 전부터 자리 잡은 불교나 개신교를 능가했다. 비로소 경남경찰청에 천주교가 자리를 잡았다. 마산교구청에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명옥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주교님께서 직접 방문하시어 격려해 주셨다. 나의 정성과 노력으로 경남경찰 역사에 가톨릭 신앙이 뿌리를 내렸다고 감히 자부한다. 은총을 입어 이듬해 경찰조직의 4% 이내의 계급인 경감 승진의 영광을 안았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그 때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제천단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