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길은 여전히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이다. 16년간 등하교를 하던 길이라 두발의 감촉만으로도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비포장도로였지만 쭉 뻗은 신작로라서 시골길 치고는 잘 생긴 길이었으며 군데군데 오래된 무궁화나무가 오가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어쩌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연기처럼 먼지가 흩날렸는데 그 속에서 매일 아침 무궁화 꽃이 하나, 둘 피어올랐다. 피어 난 꽃잎 위에 켜켜이 먼지가 다시 앉았고 그 먼지를 헤치고 또다시 꽃이 피어오르기를 끝없이 반복했던 내 젊은 날의 아련한 꽃길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푸른 5월, 어버이날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가 항암치료로 머리가 대머리처럼 빠진 채 집으로 오셨다. 그러자 할머니는 매일 새벽 그 길을 걸어 장을 보러 가셨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이른 장보기였으리라. 새벽닭이 울기도 전, 세시쯤 일어나신 할머니는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이십 리 길을 걸어 읍내까지 다녀오셨다. 꼭꼭 숨겨두었던 비상금으로 어떤 날은 조기도 사오고 어떤 날은 자반고등어도 사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수저를 내려놓기까지 누가 감히 생선접시에 젓가락을 가져가는지 뚫어지게 지켜보고 계셨다. 가련하게도 할머니로서는 그 것만이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버지가 다시 항암치료를 받으러 가시면 어머니는 그 길을 통해 끝없이 보신탕을 날랐다. 긴 병간호기간 내내 입맛을 잃은 아버지를 위해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보약이라고 여겨서다. 병원 한 귀퉁이에서 휴대용 버너로 덥혀야 할 때마다 병원 관계자는 물론 간호사들도 냄새가 진동한다며 요즘 누가 그런 걸 먹느냐고 질색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것만이 아버지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유일한 힘이라고 믿었기에 못들은 척 계속 보신탕을 나르고 또 날랐다.

가장 힘차게 그 길을 오간 사람은 나였다. 새로 산 자동차에 병원을 오가는 아버지를 태우고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며 다녔다. 새내기 월급의 절반을 잘라 갚아야 하는 빚 덩어리 할부차를 야무지게 몰고 다닌 것이다. 당시 자가용을 타고 고향 집을 찾는 이웃 선배를 출세했다며 부러워하시던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자부심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 무리해서 산 차다. 아버지께는 회사에서 차가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마치 내가 자가용 기사처럼 뒷좌석을 최대한 넓혀 편안히 모시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운전하는 아들의 대견한 모습을 가까이서 보시려는지 앞자리를 고집하셨다. 그리고 아는 분이 지나칠 때마다 차를 세우게 하고 아들회사에서 나온 차로 병원 간다며 자랑 하셨다. 나 역시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그 것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같은 길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다시 걷게 되면 떠오르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안타까움이 있다. 할머니는 그 길을 걸으면서 무궁화 꽃과 소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출과 함께 피우기 시작한 부지런한 꽃이었지만 새벽 장을 보러 가는 할머니보다는 게을러서 그렇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 길을 오가며 활짝 핀 무궁화 꽃을 마주볼 수 없었다. 보신탕 국물을 담은 들통을 이고 들고 눈물로 오가던 길이라 색맹도 아니면서 색색의 꽃이 뿌옇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속 모르게 출세한 아들의 차에서 위안을 찾는 아버지의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 언제나 먼 산만 바라보며 운전을 해야 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다. 누구라도 삶은 끊임없이 만남과 이별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크고 작은 인연을 따라 쉼 없이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다. 기왕이면 한 세상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만 반복하면 얼마나 좋을까만 아쉽게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때로는 아주 길고 때로는 찰나에 의한 만남과 이별이 이어지곤 한다. 그 많은 만남 중 가장 큰 만남은 가족과의 인연이다. 그런데 큰 만남일수록 이별의 길이도 길어서 문제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긴 이별이란 남아있는 자에게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참으로 가늠하기 힘들다.

그런 긴 여정을 따라 어느 날 할머니도 어머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망히 떠나셨다. 이별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별은 아직 진행형이다. 이별했지만 이별이 완성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만나기 때문이다. 때로 사진으로 만나고 추억으로도 만난다. 글 속에서도. 꿈속에서도 만난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웃집 어른을 보다가도. 자식들의 얼굴에서도 계속 만난다. 그리고 자반고등어에서도. 보신탕 국물에서도 만나며 지금은 무궁화나무가 없어져버린 옛 고향 길을 지나며 여지없이 그분들을 또 만난다.

내년 어버이날 즈음 아마도 나는 그 길을 다시 걷게 될 것이다.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에 더 이상 흙먼지 같은 것은 이제 날리지 않는다. 벼이삭이 고개 숙이던 들판은 회색 빌딩이 꽉 들어차 있고 가로수 또한 무궁화 대신 어디선가 잘 길러진 느티나무가 옮겨와 살고 있다. 무릇 가로수라 함은 지나가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 소임이겠지만 나는 차분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가로수가 은행나무면 은행나무대로 느티나무면 느티나무대로 그 의무를 다하고는 있지만 나의 고향 가는 길 만큼은 옛 그대로의 무궁화나무이길 나는 바란다.

세월 따라 가로수도 바뀌고 가치관도 변했지만, 어쩌랴! 내 가슴속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날의 무궁화 꽃이 계속해서 이렇게 피어오르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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