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초반 홀로 되시어 종갓집 맏며느리이자 7남매의 어머니로서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사신 장모님
40대 초반 홀로 되시어 종갓집 맏며느리이자 7남매의 어머니로서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사신 장모님

나의 장모님 고 엄옥순 여사께서는 1913년 단양군 어성천면에서 태어나셨다. 4남매의 둘째 딸로 곱게 성장하여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매포면 우덕리에 사는 장용훈 님과 중매로 결혼하셨다. 장인께서는 단양 장씨 종손이어서 종갓집 며느리가 되셨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농삿일을 하면서 한 달이 멀다하고 돌아오는 제사를 받드셨다. 시아버지가 종갓집 어른이라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상차림을 하여 접대하고 예를 갖추는데 소홀하지 않으셨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어머니께서 별세하셨다. 그 후 남편이 외아들로서 동서(同壻)가 없으니 오직 혼자서 많은 일들을 감당하셔야만 했다.

그렇게 힘든 삶 속에서 3남4녀 일곱 남매를 낳으셨다. 막내딸을 낳은 직후에 장인께서 별세하셨다. 장모님은 40대 초반에 그야말로 청상과부가 되셨다. 가장인 동시에 종갓집 며느리로서, 7남매의 어머니로서 일은 더 많아지고 힘들었다. 오척 단신 왜소한 체구였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하신 분이었기에 감내하고 극복하셨던 것 같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자녀들 가정교육에도 최선을 다하셨다. 시골에서는 중등교육을 시키기 어려운 시절임에도 장남과 차남을 중학교에 보냈다. 셋째 아들과 막내딸은 서울과 영월에 유학을 시켰다. 겨울철 농한기에는 보따리장사를 하면서까지 학비를 마련하셨다. 홀로 자녀들 혼사와 시부모님 장례 등 큰일을 치르고 온갖 고생을 다하신 효부이자 장한 어머니셨다.

막내딸은 후일 내 아내가 되었다. 아내는 유아 시절 아버지께서 작고하셔서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장모님의 사랑이 더 애틋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가르쳐야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사립학교인 모 여고에 유학을 보내셨다. 서모 슬하에 이복 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7남매의 맏이인 나와 결혼한다고 할 때는 실망이 크셨을 것이리라고 짐작한다.

1978년 3월5일 사글세방에 신혼살림을 차릴 때 직접 만드신 목화 솜이불 두 채와 14인치 흑백 TV, 그리고 내 집 마련 후 장롱 사라고 현금 30만원을 주셨다. 당시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으로서는 파격적이고 큰돈이었다. 그 돈은 장모님 당부대로 1986년 창원에서 새집을 짓고 입주할 때 ‘통영자개농’을 사는데 요긴하게 썼다.

장모님은 가난하고 원만하지 못한 집안으로 시집 간 막내딸이 늘 걱정이셨다. 단양 매포에서 창원까지는 거리도 멀고 대중교통이 불편했다. 완행열차를 두세 번 갈아타고 또 버스를 타고 막내딸네 집까지 오시는 데는 하루 종일이 걸렸다.

오실 때마다 올망졸망한 보따리가 일곱 여덟 개가 되었다. 콩 팥 녹두 참기름 들기름 산초기름 말린 산나물 등을 바리바리 싸서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들고 오셨다. 모두가 직접 농사짓고 산에서 채취한 먹거리였다. 아내와 나는 힘드시니 그냥 오시라고 해도 늘 그렇게 하셨다. 마흔 살 넘어서 낳아 남편 없이 키운 늦둥이 막내딸이라서 더 애지중지 하신 것 같다.

운명하시기 직전 해 여름철  천동리 가족 야유회에서( 오른쪽 장남 왼쪽 큰사위  둘째사위)
운명하시기 직전 해 여름철 천동리 가족 야유회에서( 오른쪽 장남 왼쪽 큰사위 둘째사위)

아들딸들이 사주는 옷들은 마다하시고 본인이 만드신 흰색 계통의 한복 치마저고리에 비녀 꽃은 쪽머리를 하고 다니셨다. 며느리와 딸들이 제발 한복 입지 말고 신식 옷 입으시라고 해도 항상 전통의상을 고수하셨다. 때문에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모님은 흰 한복에 쪽머리 모습뿐이다.

장모님은 젊어서 홀로 되신 후 가장으로서 가정을 훌륭하게 이끌어 오신 여장부다. 문중의 종부(宗婦)로서 며느리이자 어머니로서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는 분이셨다. 강직한 성품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집안을 통솔하고 자녀를 훈육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일곱 자녀와 며느리들 그 누구도 감히 장모님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만큼 하시는 말씀 모두가 옳고 사리에 맞았기 때문이다.

칠순이 넘어서도 논 다섯 마지기와 밭 800평에 직접 농사를 지으셨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일곱 남매에게 갓 찧은 햅쌀을 한가마니씩 나누어 주셨다. 김장용 고추 마늘은 식구 수에 비례하여 나누어주셨다. 집안의 어른이기에 가끔 선물이 들어오면 이 역시 모아 두었다가 고르게 나누어주셨다.

특히 멀리 떨어져 사는 막내사위인 나에게는 각별하셨다. 양주 담배 홍삼 토종꿀 등 귀하고 특별한 선물은 은밀한 곳에 깊이 보관하셨다가 주시곤 했다. 장모님은 내 식성을 빨리 파악하신 것 같다. 가끔씩 처가에 들르면 이내 부엌으로 달려가시어 번개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주셨다. 그때마다 어려서 잃어버린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참 복이 많으신 분이다. 7남매 슬하에 손자 손녀가 무려 31명이다. 그들의 배우자와 증손자녀를 합하면 어림잡아 100명에 이르는 그야말로 대가족이다. 생신 때나 집안 대소사에는 늘 자손들이 북적대는 사람사는 세상이었다.

손자 손녀들에 대한 사랑 또한 극진하셨다. 그 많은 손주들 이름은 물론이며 위아래 서열도 모두 구분하신다.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목소리에 정이 넘치신다. 손주들 용돈도 많이 들어가지만 어떻게든 비자금을 마련해 두었다가 만날 때마다 주시곤 했다.

특히 1962년도 화폐개혁 이전의 구 화폐인 10환 100환 500환 지폐 3종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신권으로 장롱에 보관하셨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에 모든 손자 손녀들에게 여섯 장(권별 각각 두 장)씩 나누어 주셨다. 지금도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없다.

막내급 손자 손녀들과 함께(오른쪽 28번 중앙 27번 왼쪽 30번 29번째 손자)
막내급 손자 손녀들과 함께(오른쪽 28번 중앙 27번 왼쪽 30번 29번째 손자)

자기관리도 빈틈없이 철저한 분이셨다. 언제나 바른말만 하고 허언을 하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곱 남매의 대가족으로 크고 작은 일에 바람 잘날 없어도 화내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다. 팔순을 넘겨서도 허리가 곧으시고 시력 청력 정신력 모두 정상일 정도로 건강하셨다.

1990년대 도시계획으로 매포읍 우덕리에 있던 우물 정(井)자 형태의 큰 처갓집은 사라졌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한일시멘트 사택이 들어섰다. 이후부터 장모님은 적성면 각기리에서 농사를 짓는 셋째 아들과 함께 생활하셨다. 농사일에 손주들 돌보시느라고 한시도 쉬지 않으셨다.

농한기인 겨울철에는 매포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과 지내지는 날이 많았다. 당시 한일시멘트 회사에서 경로당 난방비를 지원하여 집보다 더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실 수가 있었다. 1992년 2월 어느 날이었다.그 날도 다른 노인 몇 분과 함께 잠자리에 드셨다가 심야에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셨다.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쳐 의식을 잃으셨다. 골든타임을 넘겨 몇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하여 제천 시내 모 병원에 입원하셨으나 이미 늦었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달려가니 의식 일부는 돌아왔으나 언어 기능을 상실하셨다. 내손을 꼭 잡고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만 계셨다. 그 얼굴이 마지막이었으며 끝내 회복하지 못하셨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장모님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음력 정월 그믐날 춘추 82세를 일기로 황망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살아생전에 오랫동안 조금씩 저축하여 모은 돈으로 적성면 기동리 양지바른 곳에 본인 내외분과 아들들이 묻힐 땅 300평을 사 두셨다. 또 당신이 천국 가실 때 입을 옷감으로 고운 모시 한필을 준비해서 장롱 맨 밑에 놓아 두셨다. 상주들이 입을 상복 옷감으로 삼베 두필도 함께 준비해 놓으셨다. 딸들이 만든 수의를 갈아입으시고 평상시에 그리던 그곳에서 젊어서 헤어진 남편을 모셔 와서 함께 영면하셨다.

일곱 자식들이 간병할 겨를도 없이 말 한마디 남기시지 않고 떠나가셨다. 어린 시절에 일찍이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잃어버린 모정의 빈자리를 장모님께서 채워주신 기간은 불과 14년이었다. 장모님의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랐건만 효도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야속하게도 빨리 떠나가셨다. 지금 살아계셨다면 112세가 되셨을 장모님의 미소 띤 모습이 피어올라 글로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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