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만 해도 절기 만큼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복과 처서가 지나면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선선해졌고, 바람은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올해는 9월 초입인데도 여전히 덥다.
이상기온 탓인지, 봄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모종을 옮겨 심어야 할 4월엔 냉해가 걱정될 만큼 쌀쌀했고, 결국 5월이 되어서야 겨우 이식할 수 있었다.
여름이 되어 성수기를 맞았지만, 살인적인 더위가 이어지며 말 그대로 ‘찜통’ 속에 사는 기분이었다.
절기도, 세상도,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한 해였다.
예전에는 외식하는 돈이 아까워 늘 재료를 사서 손수 음식을 해 먹었다.
카페 커피 한 잔. 짜장면 한 그릇 값이나 내는 것이 아까워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질’보다는 ‘양’, ‘분위기’보다는 ‘실리’를 따지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좋은 분위기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생, 얼마나 산다고?’
외식과 배달 음식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된 시대, 나도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특히 올해는 날씨 때문인지, 밥하는 것도 귀찮고 입맛도 없어서 맛집을 찾아다니며 외식을 가장 많이 한 해이기도 하다.
나만 그런 걸까? 요즘 사람들은 편한 걸 좋아한다.
우리 집에 온 손님들도 3박 4일 묵는 동안 매 끼니를 맛집에서 해결한다.
내 입장에서는 청소도 줄고, 쓰레기도 덜 나오니 편하기만 하다.
경기가 어렵다지만, 다들 잘 쓰고 잘 즐긴다.
코로나19 이전만 해도 가족 손님들이 오면 가마솥에 삼계탕을 끓이고, 하루 종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휴가를 즐겼다.
그 정겨운 모습은 이제 사라지고, 반질반질하던 가마솥엔 녹이 슬기 시작했다.
비대면 시대를 지나면서 배달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이제는 손님을 초대해도, 여행지에서도 외식과 배달이 기본이 되었다.
최근 막내딸이 우리 부부를 위해 제천 포레스트 리솜의 독채형 5인실을 예약해 두었다.
우리와 상의도 없이 “오후 3시, 프런트로 오세요”라며 통보하듯 말했다.
그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딸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숙소는 산속에 있어 카트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도착해 보니 숲속 전망과 신선한 공기가 참 좋았다.
예전부터 한 번쯤 머물고 싶었던 독채형 숙소.
막내딸 덕분에 또 한 번 호사를 누린 셈이다.
돌이 갓 지난 손녀는 아장아장 걷고, 음식을 다 먹으면 “안 머~” 하며 고개를 젓는다.
표현이 똑부러지는 게 그저 신기하고 귀엽기만 하다.
손녀는 그야말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산소 같은 존재다.
못 본 사이 부쩍 자란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남편은 손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서울 구경시켜 줄게!” 하고 빙글빙글 돌리는데, 혹시라도 넘어질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본인은 아직도 청춘인 줄 알고 묘기라도 부리듯 안고 도니, 그만큼 손녀가 예쁘고 사랑스러운가 보다.
남편은 “막내딸이 황혼의 삶에 기름칠을 해주는 것 같아 고맙다”고 말한다.
재잘재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의 황혼이 또 얼마나 즐거울까.
산책 후에는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이제는 손수 음식을 차릴 필요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시대다.
작년 가족여행에서는 호텔형 리조트에 묵었는데, 취사가 되지 않아 외식 대신 김밥을 싸고 수육을 삶아 직접 저녁을 준비했었다.
그땐 내 손이 많이 갔지만, 이번에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도 맛있는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요즘 리조트에는 전기밥솥도 없고,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 정도만 구비돼 있다.
간단하게 컵라면 정도만 가능하도록 바뀌었다.
이 모든 흐름이 외식과 배달 문화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여행에서 막내딸은 부모를 모신다고 넓은 투룸을 예약해 주었다.
킹사이즈 침대가 있는 방과 온돌방 하나씩.
자식들은 효도한다고 침대방을 양보했다.
침대방과 온돌방의 차이가 꽤 커 미안한 마음에 거절했지만, 결국은 기력 없는 노인이 질 수밖에 없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노인들도 온돌방은 오히려 힘들다.
어느 리조트를 가도 대부분은 침대방 하나, 온돌방 하나.
친구들과 여행을 가도 이 구조 때문에 불편할 때가 많다.
요즘은 대부분 침대에서 자기 때문에 모두 침대방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도 생긴다.
남편은 자식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편한 우리 집 두고 왜 돈 주고 여기서 자야 하느냐고 구시렁거린다.
하룻밤의 번개여행이었지만,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독채형 숙소에서 막내 사위와 딸의 배려 덕에 좋은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우리의 일상은 참 많이 달라졌다.
정성껏 차려 먹던 집밥은 점점 줄고, 외식과 배달 음식이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예전 같으면 돈이 아까워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들이 지금은 나를 더 편하게, 삶을 더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맛있는 음식을 꼭 내가 만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며, 좋은 시간을 꼭 부엌에서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외식이든 배달이든, 그 안에서 가족과 나누는 시간과 마음이 따뜻하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집밥’다운 밥상이 아닐까 싶다.
